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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다섯 살 때 동네 형들과 함께(윗줄 오른쪽이 나)
다섯 살 때 동네 형들과 함께(윗줄 오른쪽이 나) ⓒ 나관호
기자회원이 되는 방법을 문의했을 때 받은 안내 직원의 세밀한 '배려의 친절', 사진 올리는 방법을 몰라 문의를 했을 때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받은 편집 기자들의 '부드러운 친절', 그리고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어준 아버지 기사를 편집해준 어느 기자의 '적극적인 친절'은 나에게 감동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감동은 내가 경험한 상대적인 환경의 영향도 원인을 제공했다. <오마이뉴스> 기자회원 가입하기 전 나는 어느 회사 대표가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을 보내와 전화를 걸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대표가 메일을 보냈으니 통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직원의 태도는 자기 회사의 사장을 존중하지도, 전화를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지금 회의 중이니 11시에 100번으로 직접 전화하세요."


쌀쌀맞은 그 여직원과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했다. '이 회사는 끝이구나. 직원이 저모양이니. 신뢰할 만한 곳이 못되는구나. 이 회사 물건은 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결과는 시간을 요하는 내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고, 후에 자신들의 불찰이라는 후회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일곱 살 구정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일곱 살 구정 때 ⓒ 나관호
그런 찝찝함에 있던 터에 친절한 <오마이뉴스>를 접해서 그런지 감동은 충격파로 다가왔다. 벌거벗은 고백을 하자면, <오마이뉴스>에 대한 평소 나의 생각은 비판기능만을 주로 사용하는 언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성원들도 다소 딱딱하고 비판적일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그런데 작은 친절이 나의 그런 선입견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나는 생각했다. '<오마이뉴스>는 꼭 읽어야겠구나. 더 관심을 가져야겠구나. 그런 자세를 가진 기자들의 공동체라면 신뢰할 수 있겠구나' 훗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혹자는 나의 이런 감동을 두고 '뭘 그런 것을 가지고' '웃겨' '지나치군' 등등. 그런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훗날 추억으로 남을 것이고, 내 마음의 두터운 각질을 하나 벗겨 주었으니까. 더구나 또 다른 추억인 잃어버린 친구를 찾을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나는 다시 남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면서 웃음을 짓는 것은 '또 다른 잃어버린 친구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까' '이번에는 어느 나라에서 올까'하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치를 갖는다.

아버지는 공직에서 물러나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고물상이었다. 30여명의 엿장수들이 리어카나 목에 끈을 건 좌판을 메고 다니면서 엿을 팔았다. 그들이 고철을 모아오면 그것을 파는 일이 아버지가 선택한 사업이었다. 큰 마당을 가지고 있던 우리 집은 여기저기 고철덩이로 가득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런 집 모양이 싫었다.

더구나 고물상 집 아들이라는 타이들은 더더욱 싫었다. 내 이름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고물상 집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꼭 이름 앞에 붙였으니까. 그런데 성공하지는 못하셨다. 이유는 한 가지 빚보증을 많이 서 주셨다가 4번의 뒤통수를 맞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술 한 잔 거하니 드시고 항상 '정직'에 대해 강조하셨다.

합숙하며 지내는 엿장수 아저씨들은 나의 또 다른 친구였다. 여기저기 다니는 그들에게서 숨겨진 세상 소식을 듣곤 했다. 물론 그중에는 '썰'이 많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재미있는 것은 "남자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리 밑에서 주어오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존재에 대해 한동안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나는 엿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그 시절 엿을 만드는 과정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위생관념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사업을 하셨다. 그리고 무명의 화가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셨다. 대나무 숲 사이 큰 호랑이, 소나무 위 학, 매화와 난이 집 안에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뚝닥뚝닥 잘 만드셨다. 아버지와 나도 그런 면에서 닮은꼴이다.

몇 주 전 어머니를 모시고 불갈비 집에 갔었다. 그때 그곳에서 아버지의 발명품(?)을 보고 웃었다. 그것은 구리를 연속적인 마름모 모양으로 꼬아서 만든 석쇠였다. 아버지가 30여 년 전에 만들어 우리 집에서 사용했던 그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 다른 재활용 발명품을 만드셨다. 그것은 병뚜껑을 이용해 만든 냄비 받침대였다. 나는 아버지 발명품을 무단 도용해 중학교 때 재활용 발명품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내 자가용, 세발 자전거를 타고
내 자가용, 세발 자전거를 타고 ⓒ 나관호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엇이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잘 도와주셨다. 교육 받지 못한 먼 친척들을 집에서 먹고 재우며 키우며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땅을 사주고 그곳에 철공소를 만들어 중소기업인으로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 성공한 먼 친척의 집에 들르셨을 때 손에 쥐어 주는 낡은 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우셨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워줬는데"하시며 회한과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다. 그 먼 친척과는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됐다.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죽음이 오버랩 된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사업이 쪼그라들고 당신 자신의 꿈을 더 펼쳐보지 못한 아버지는 어깨가 굽어 계셨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났다. 폐결핵으로 질병의 고를 짊어지셨다.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아버지의 의지로 몸은 호전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어머니 사촌 오빠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고 서울로 올라오시는 길이였다. 장항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부모님 좌석 가까운 근처에 할머니 한 분이 입석으로 서 계셨다. 다른 젊은이들은 할머니를 외면했지만 아버지는 안쓰러운지 그 할머니를 아버지 자리에 앉게 하셨다. 아버지는 피곤하고 지친 몸이었지만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셨다. 그런데 그것이 아버지를 떠나보낸 시작점이었다.

그 할머니는 고맙다며 손수건에 싸놓고 있던 찐 계란을 아버지에게 주셨다. 아버지는 사양했지만 드셔야 했다. 그런데 피곤하고 지쳐서 소화력이 떨어진 아버지는 속이 거북하다 하셨다. 집에 도착하셔서도 다른 음식을 잘 들지 못하셨다. 다음날 나와 어린 동생은 학교에 갔고, 어머니는 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셨다. 그 사이 아버지는 멈추었던 각혈을 하셨다. 계란으로 인한 체증으로 가슴과 속이 불편하셨고, 숨 쉴 틈을 주지 않은 각혈은 지쳐버린 아버지의 심장을 멈추게 했다. 이불 가득 피를 쏟고 혼자서 고통 가운데 돌아가셨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시려고 노력했고, 손해만 보시면 살았던 아버지가 허망하게, 혼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갔다. "악하게, 피해를 주며 살고 있는 어느 아저씨는 배가 나오도록 먹고 살고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어리석은(?) 선택들도 원망스러웠다. 그 할머니의 계란을 먹지만 않았다면,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면, 빚보증을 서지 않았다면, 집문서를 통째로 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버지의 닮은꼴로, 꿈을 대신 이룰 대리인으로, 당신의 희생으로 남긴 복을 대신 받을 자로 이 땅에 있다.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가죽을 남기지 못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겨 놓지 못한 '나만의 영웅'이었지만 가능성을 가진 씨를 남겨 놓았다. 나는 지금 그렇게 서 있다.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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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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