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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왼쪽 첫번째가 아버지
아래 왼쪽 첫번째가 아버지 ⓒ 나관호
빡빡머리의 학창시절 모습, 군복 같은 교복 입은 친구들과의 기념사진, 마라톤에 참가했던 사진, 졸업 후 취직했던 문구회사 사진, 이모들과 같이 찍은 사진, 어머니와 포즈 잡고 찍은 사진 등. 빡빡머리 사진은 나의 중학교 시절과 비슷해 웃음이 난다. 어머니의 팽팽한 피부는 세월의 흐름을 알게 한다. "봄, 노들강변"이라고 새겨 있는 어머니 친목계 모임 사진도 보인다. 현충사 앞 기념사진에는 아줌마들 사이에 있는 내 모습도 있다.

그런데 왼 가슴에 손수건을 찬 일곱 살 내 사진을 보자 뭉클하다.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자 어린 시절 기억이 솔솔 난다. 아버지는 늦둥이 아들을 데리고 여러 곳을 다니셨다. 사진도 많이 찍어 주셨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나를 늘 데리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가끔 친구들을 다방에서 만나셨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배운 다방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커피를 시킬 줄 아는 것이었다. 다방에 들어서면 내가 먼저 말했다.

"아줌마, 나는 크리무 주세요?"

커피 대신 크림 가득한 특수제작 메뉴는 내 것이었다. 그러면 다방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한의사 아저씨는 돈을 주시곤 했다. 어떤 아저씨는 여러 사탕과 과자가 가득한 '종합선물세트'를 사들고 오시곤 했다. 집에 돌아갈 때는 돈과 선물이 넘치도록 많았다.

아버지의 가르침, 왜 잊고 있었을까

마라톤 경기 후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아버지다.
마라톤 경기 후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가 아버지다. ⓒ 나관호
집에 도착하면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는 인생 공부가 시작된다. 첫 번째 과목은 동네 아이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과자와 사탕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아버지가 직접 나누어 주는 법이 없었다. 내가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외아들인 내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하신 아버지의 특별교육이었다. 육촌 주영이는 늘 나보다 많은 과자를 먹었다. 두 번째 과목은 받은 돈을 저금통에 저축하는 것이었다. 돼지저금통은 동전보다 지폐가 많을 정도로 항상 배불렀다.

아버지의 학생시절.
아버지의 학생시절. ⓒ 나관호
나는 어린 시절 존 웨인의 서부영화를 보면서 골목을 누비며 총싸움 놀이하는 걸 좋아했다. 당시 조그만 돌을 넣어 쏠 수 있는 권총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존 웨인이 권총을 사용하고 나서 말안장에 있던 장총 꺼내 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장총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장총을 사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저녁 퇴근 시간에 아버지는 장총을 들고 오셨다. 그런데 총을 사신 것이 아니라 철물점에 가서 직접 만들어 오신 것이다. 이때의 기억은 내가 부모로서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알게 한 추억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어느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비가 좋아 아이들과 비를 맞으며 슬라이딩도 하고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비에 젖은 채 서로 보면서 웃고, 덜덜 떨면서도 좋아했다. 그렇게 비를 맞고 저녁때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회초리를 드셨다. 이유는 감기 걸리면 큰일이 나는데 비를 너무 맞았다는 것이다. 다리가 멍들도록 맞았다. 그러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안으시며 우시는 것이다. 그 눈물의 의미를 부모가 되어서야 알았다. 나는 아버지 사진과 내 사진을 번갈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버지'는 무엇이든 한다

또 다른 추억이 생각난다. 어느 날은 내가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가 갖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당시 가죽공과 가죽 글러브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까지 가셔서 공과 글러브, 방망이와 공까지 즉시 사오셨다. 나는 그것이 아까워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또 사줄 테니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결국에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흔한 물건이 아니기에 누가 사용하는지 살펴봐야 했다. 그런데 누렁이를 키우는 5학년 형이 내 물건을 사용하고 있었다. 분명 내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있어서 한번 본 것은 기억을 잘하는 나였기에 범인을 잡은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니가 본 것이 아니니 니 것이라도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부모님.
부모님. ⓒ 나관호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집 앞마당에서 놀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이 누렁이를 풀어놓는 바람에 개에 물리게 됐다. 피가 운동화 가득 번졌다.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알렸고 놀란 아버지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슈퍼맨처럼 달려가셨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으로 보였다. 그렇게 간절히 아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생각한 사람은 못 봤으니까.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나의 큰딸 예나가 출생 3달 만에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야 명확히 알게 되었다. 내가 대신 입원했으면 했었다. 어린 것의 팔에 링거가 꽂혀있는 것을 보면서 울었으니까. 그나마 다른 아이들처럼 머리에 링거가 꽂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핏줄을 못 찾아 머리에 꽂으려는 간호사와 내가 입씨름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는가.

추억 속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를 본다. 아버지는 추억에 묻혀 있고, 실체는 하늘나라에 있지만 내 속에 그분의 존재가 남아 있다. 아니 판박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시원한 이마, 팔자걸음, 자식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식을 무인도에 혼자 사는 존재처럼 만들지 않으려는 가치관은 너무 닮았다. 난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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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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