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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이 꽃은 제주도 홍노리(지금의 남제주군 동흥동, 서흥동 일대)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꽃이 도라지꽃을 닮아서 '홍노도라지'라는 이름이 붙은 꽃이다. 처음 이 꽃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제주도 지도를 펴고는 '홍노리'를 찾았지만 마치 전설 속에나 있는 지명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홍노리가 남제주군 동흥동과 서흥동 일대라는 것을 알고는 도시개발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아쉬워했다. 습한 나무그늘에 사는 것들이 개발된 도시의 어딘가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접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후 식물도감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했음을 알았다. 처음 발견된 곳이 홍노리지 그 곳에만 피는 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홍노도라지는 한라산 계곡의 그늘진 습지와 바위틈에서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그러나 강인하게 자기의 때에 피어났던 것이다.

ⓒ 김민수
그를 처음 만난 날 나는 성판악 코스를 따라 백록담을 향하고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가면서 만나는 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호기심이라는 것은 자꾸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으로 나의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던 중 그늘진 숲에서 홍노도라지를 만났다.

그러나 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숲은 어두워 삼각대 없이 보급형 카메라로 작은 꽃을 담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계속 흔들리는 사진과 씨름을 하다 배터리도 다 떨어져서 첫 만남의 순간을 담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아쉬워하며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홍노도라지에 대한 환영에 시달렸다.

성판악이 어디라고 다시 올라갈 것이며, 그 계곡을 어찌 다시 찾을 것인가? 그리고 다시 찾은들 그 꽃이 여전히 활짝 핀 채로 나를 반가이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니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 김민수
그리고 이듬해인가 기적처럼 그를 만났다. 금난초와 은난초가 피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던 중 홍노도라지를 만난 것이다. 그리던 꽃을 만나는 기쁨, 간절히 원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기분과 다르지 않다.

제주도를 떠나 서울 살이를 한 후 5개월여가 되었다. 그 동안 참 많이도 그리웠던 제주, 그러나 현실은 그리운 것을 껴안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팍팍했기에 가끔씩 제주도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서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 제주의 꽃 사진들을 보다가 '홍노도라지'에 눈길을 주는 순간, 지금이라도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마도 '홍노도라지'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딱 요맘때 피어 있을 것만 같은 꽃, 그를 만났던 그 곳에 가면 어김없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줄 것만 같은 꽃, 이제 만나면 제대로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에 한 때 고향처럼 여기고 살아가던 섬이 그리워진다.

ⓒ 김민수
내 삶의 여정에서 잠시나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곳,
그 곳을 미치도록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 너일 줄은 몰랐다.
숲 속 나무그늘, 어두운 계곡의 바위틈,
한 줄기 햇살도 눈부시다고 수줍어하며 웃음 짓던 너,
너를 만나 가슴 뛰었던 그 곳에 가고 싶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곳에 있을 때에는
너를 정말 그리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먼 곳에 있어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리움을 접어둬야겠다.
내가 그리워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너는 너대로 늘 그 모습으로 그 곳에서 피어 날테니...

(자작시 '홍노도라지')


ⓒ 김민수
어쩌면 '그리워하는 것',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리라. 이기심의 발로, 지천에 있는 행복을 다 제쳐두고 흔하지 않은 행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미련함인지도 모르겠다.

내 가까이에 있는 것,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더 먼 곳에 있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득, 내가 오늘 맞이한 하루가 그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한들 주어지지 않은 하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 소중한 것, 내가 사랑해야 할 것, 내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멀리에 있지 않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노안이 왔나보다. 내 영혼에 다초점 렌즈가 필요한 시기인가 보다.

덧붙이는 글 | 오늘 소개 된 '홍노도라지'는 2005년 5월 4일 한라산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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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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