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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베오데오 알아요?"

헨니는 나를 부를 때, 기분에 따라 우리말로 '아저씨' 혹은 '오빠'라고 부릅니다. 헨니가 그녀와 동업을 했던 수산(Susan)의 미장원을 나오며 '베오데오'를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인도네시아어로 '바보'라는 뜻을 가진 'bodoh'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 수산의 아이들(눈밑의 상처를 머리로 가렸다)과 헨니
ⓒ 고기복
"일본에서 번 돈으로 남편에게 가라오케 차려줬는데, 얼굴을 저 모양으로 만든 거야."

헨니는 수산의 멍든 눈이 왜 생겼는지 설명하면서 화가 치미는지 수산이 바보처럼 당하고만 산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수산은 일본에서 6개월을 일하고, 6개월을 본국에 돌아오는 식으로 2년을 해외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눈두덩이 찢어지도록 맞고도, 상처에 대해 묻자 '나뭇가지가 떨어지면서 얼굴을 쳐서 생긴 상처'라며 남편을 두둔하였습니다.

"아이고, 정말. 이게 다 돈 번다고 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에요."

생각할수록 분한지 헨니는 차를 몰면서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헨니는 자신 역시 이주노동을 해서 번 돈 중 일부를 남자에게 털리는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더욱 기가 막히는 듯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던 당시에 만나 결혼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가는 통에 생과부가 되는 경험을 했던 헨니로서는, 무책임한 남자들에 대해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헨니는 자신의 말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톰보이로 자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미 10여 년 전,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선 보기 드믄 '여자 택시운전기사'였다는 이력이 말해주듯 강단이 있는 또순이입니다.

한국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할 당시, 같이 근무하던 회사에는 중소기업 공익요원들과 교정시설에서 나온 남자 수감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행여 수작이라도 걸라치면, 엄지손가락을 코에 대고 혀를 날름거리며 약을 올렸다고 할 정도로 명랑하면서도, 자기 일은 똑 부러지게 하여 회사에서 가장 잔업을 많이 하는 직원으로 소문날 정도였습니다.

헨니에 의하면 2년 동안의 연수생 생활 동안 가장 적게 잔업을 했던 달의 경우 98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서 번 돈을 날렸던 경험이 있는 헨니로서는, 자신의 경험을 답습하는 듯한 친구 수산의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헨니가 그런 아픈 상처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귀국하자마자 열었던 와르뗄(Wartel·전화방)과 식당, 수산과 같이 시작했던 미용실 등에서의 바쁜 일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핸드폰 보급이 늘어나면서 수입이 예전 같지 않지만, 와르뗄은 귀국 후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와르뗄이 한산해지면서 미용실도 같이 한산해지자, 얼마 전 미용기술을 갖고 있던 수산은 좀 더 목이 좋은 곳에 따로 가게를 내었고, 헨니는 이제 다른 사업 아이템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헨니의 경우를 두고 사람들은 '해외이주노동으로 돈 벌어 성공했네'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해외이주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모는 차를 타고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배로서 한마디 하라는 권유에 헨니는 모인 이들에게 '해외이주노동이 인생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 예비 이주노동자들과의 만남 자리에 태극기가 달린 차를 몰고 간 헨니
ⓒ 고기복
하지만 자신이 일하던 나라의 국기(태극기)를 달고 다닐 정도로 이주노동을 했던 한국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 헨니의 말은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듣기에 '배부른 소리'였나 봅니다.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제 집 짓고, 차를 가질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요? 이 아이들 교육은 어떻고요? 여긴 돈벌이가 되지 않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누군들 제 고향 버리고 해외로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딱 한 번만이라도 죽어라 일할 기회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다, 한국어 인증시험 보고 브로커에게 돈만 뜯겼다는 집주인 유숩깔라(Yusuf Khala)의 말이었습니다. 헨니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이 경험했던 가정 해체 등의 아픔을 시시콜콜 말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떤 희생인들 감수하지 못하겠는가?'하는 각오 등이 묻어난 말이기도 했습니다.

헨니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별다른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주노동의 장밋빛만 보고,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을 두고 속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저씨, 베오데오 알아요? 돈 번다고 성공한 거 아니잖아요?"

▲ 출국을 준비중인 예비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족들과의 만남에서
ⓒ 고기복

덧붙이는 글 |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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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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