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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홍보성 광고와 동일한 내용의 글로 도배가 돼 버린 한 학교 누리집 자유게시판. 학교 구성원들의 글은 보이지 않는다. 조회수도 대체로 한자리수다. 조회수가 '0'인 글도 있다.
ⓒ 인터넷 화면캡처
학교라는 공간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무수한 말(언어)들이 종횡무진 하는 곳이다. 그런데 불과 1, 2년 전부터 학교에서 '말'이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중·고교들이 학교 누리집(홈페이지)을 실명제로 전환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건전한 인터넷 예절과 문화 조성을 위해서'라는 명목을 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담은 '발언'을 차단하려는 학교 측의 의도가 숨어 있다. 학교가 아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제제기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좀 더 효율적으로 통제를 하겠다는 뜻이다.

실명제가 실시되기 전 실제로 한 고교에서는 자유게시판에 익명으로 학교 급식의 문제점에 관련한 글을 올린 학생의 아이피(IP)를 추적했다. 학교 측은 해당 학생을 찾아내어 올린 글을 지우도록 강요하고 경고 조치했다. 문제의 글도 글이지만 글을 쓴 당사자를 찾아 징계하는 데에 학교 측은 더욱 혈안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학교에서는 실명으로 두발 규정의 문제를 지적한 학생에게 담임 교사가 폭언을 가하고 학부모까지 학교로 불러 '면학 분위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자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실명제 도입 이후, 자유게시판 = 광고게시판

▲ 대부분의 중·고교 누리집에서 '글쓰기'를 누르면 이러한 내용의 화면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나타난다.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아예 '글쓰기' 항목을 찾을 수 없는 곳도 많다.
ⓒ 인터넷 화면캡처
실명제가 도입되기 이전의 학교 누리집 자유게시판(혹은 열린게시판)은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가 넘쳐나고 학교 구성원간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다.

하지만 실명제 도입 이후 대부분의 학교의 자유게시판은 '광고게시판'이 돼 버렸다. 학교 구성원들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각종 단체의 광고와 대학의 홍보용 마당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다양한 별명으로 여러 의견들을 쏟아내던 아이들이 떠난 게시판은 매립으로 죽어가는 새만금 갯벌의 생태를 닮아가고 있다. 기껏해야 시험 관련 공지사항이나 학교 홍보용 자료가 가끔씩 올라올 뿐이다. 사실상 개점폐업 상태다.

학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러 가지 민원으로 소란할 일이 없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다. 그러나 학교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기를 꺼려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무엇으로도 학생을 제대로 공감시키거나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 회원등급을 안내하는 S학교의 누리집 안내문 화면. 관리자는 1등급이다. 그밖에 교사(3 or 5등급), 학생(7등급), 학부모(8등급), 일반인(9등급)으로 구분돼 있다. 로그인후 실명을 적지 않으면 "사전 연락이나 동의 없이 삭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장도 보인다.
ⓒ 인터넷 화면캡처
중국 춘추시대의 거상 여불위(呂不韋)는 "백성은 덕(德)으로 다스리고 언로(言路)를 막지마라!"는 통치이념의 핵심을 말한 바 있다. 학교도 학생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고 당당하고 떳떳해져야 한다.

학생들의 언로인 자유게시판을 활짝 열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소통하려 애써야 한다. 학생들의 입은 막아놓은 채 자신의 이야기만 들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자유게시판이 제 기능을 되찾아 학교와 학생이 자유로이 소통하는 가운데 자유게시판을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배우고 누릴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 소통의 문을 걸어 잠근 것도 학교이고,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학교다. 학교의 선택만 남았다.

▲ 실명제의 실시로 아이들이 버리고 떠난 자유게시판의 모습. 2005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등록된 글이 겨우 10개다.
ⓒ 인터넷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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