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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요-3월이요-희망이다"

..스물세 살이요-삼월이요-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新開地)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이상 <봉별기> 중에서 인용


위에 인용한 문장과 같이 소설가 이상은 소설 <봉별기>에서 폐병에 걸린 매우 무기력한 인물인 '나'를 통해 지식인의 무기력하고 자학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래서 빛나는 스물세 살 청춘도 우울하고 3월도 각혈이 터지는 죽음의 시절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을 두고 보면 삶을 자학하고 죽음을 말하기에는 3월은 너무 설렌다. 나와 아이들의 삶의 공간인 학교는 "21세기요-3월이요-희망이다"라고 바꾸어 말해야 할 것 같다.

▲ 삶을 자학하고 죽음을 말하기에는 3월은 너무 설렌다.
ⓒ 임정훈

아이들과 어우러지는 일은 그 자체가 거룩한 말씀이요, 환한 눈부심이다

곧 온누리의 산과 들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들이 다투어 피어날 것이고, 교정(校庭)의 진달래와 미선나무며 철쭉, 목련도 눈부신 빛을 열어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교실과 교정에서 다시금 아이들과 어우러질 일들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거룩한 말씀이요, 환한 눈부심이다.

3월 입학식에서 만난 신입생들의 눈빛에서는 아직은 낯설기만 한 새 학교에 대한 긴장감이 반짝인다. 그러나 지금이야 좀 어색하고 서먹하겠지만 곧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노련해 질 것이다. 신입생들로 말하자면 유치원을 빼고도 벌써 학교생활이 10년째에 이르는 수준급 경력자들이 아닌가!

새 학기가 되면서 분주한 것이 신입생들뿐이랴. 학년이 올라가는 아이들은 그들대로,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나름의 계획을 세우느라 설레고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맘때쯤이면 1년을 고생 없이 지내려면 학기 초에 아이들의 버릇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분주한 교무실을 유령처럼 떠돈다.

교무실을 떠도는 유령의 말 "학기 초에 아이들의 버릇을 잡아라"

언제는 안 그랬을까마는 요즘은 가뜩이나 다들 귀하게 자란 아이들인지라 교사들이 보기에 버릇없이 구는 아이들이 있다. 또 생뚱맞은 주장이나 의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엇이 잘못이냐며 대꾸하는 녀석들도 가끔은 있다.

그러다보니 고육지책으로 그런 말이 만들어졌을 테지만 그 '유령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심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생명의 환희로 충만한 3월,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무서운 전쟁을 사제지간에 치러야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아이들도 오랜 경험(?)으로 학기 초의 이런 분위기를 잘 아는 터라 잘못 걸리면 된통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알아서 기는' 자발적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 이렇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가르친 건 누구인가! - 속으로는 강제되는 각종 규정에 대한 불만과 교사에 대한 원한을 가득 품은 채 말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신입생이든 재학생이든 지나칠 만큼 머리가 짧아지고 차림새가 단정해지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다.

▲ 교사(학교)의 지도와 통제의 편리를 위해 유형, 무형의 폭력을 휘두르고 인권을 짓밟으며 아이들을 '잡는' 일은 아름답지 못 하다.
ⓒ 임정훈

이제는 희망을 말할 때- 진정한 소통을 위해 강제와 강요를 최소화해야

이를 두고 '처음부터 풀어주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간단히 정리하지는 말았으면 싶다. 스스로 정당화하고 변명하다보면 교사도 권력이 되고 만다. 그래서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강제와 강요를 최소화해야 한다.

교사(학교)의, 지도와 통제의 편리를 위해 유·무형의 폭력을 휘두르고 인권을 짓밟으며 아이들을 '잡는' 일은 아름답지 못 하다. 알아서 기는 눈치로만 유지되는 학교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이야기는 혼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강제하는 독백이 아니라 상대와 더불어 웃음을 띤 얼굴로 도란도란 속삭이는 대화를 말한다.

대지가 무언(無言)의 말로 모든 생명들의 봄잠을 깨우듯이 아이들에게 나직하게 말을 걸어 온전한 소통에 이를 수 있다면 학교는 진정한 희망의 교육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의 생명이요 씨앗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숲페의 학교와 인권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20세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내가 겪었던 학교나 최첨단 문명의 21세기를 살며 학교에 다니는 지금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교육 현실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학급 정원이 좀 줄었고 교단선진화 기자재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비롯한 몇몇 기계문명이 도입·설치된 것 말고는 세기가 바뀌는 동안에도 학교는 진화하지 않았다.

온갖 낡은 규정도 그렇고,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이 기본이 되는 학교 문화도 그대로이다. 그래서 교사와 아이들은 아우성이다. 교사들은 온갖 통제만이 지배하는 교육 현실에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말하며 존중받고 싶다고 외친다.

이 연재기사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될 것 같다. 현재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아이들의 학교 이야기 그리고 교사와 학생이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사람'이라는 동등한 가치에서 생각해보는 학교의 인권 이야기 등을 중얼거려 볼 생각이다.

사랑과 용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진정한 사제관계의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생명의 학교, 희망의 학교를 꿈꾸며. / 임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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