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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책표지
ⓒ 황금나침반
빗방울처럼/나는 혼자였다./오, 나의 연인이여, 빗방울처럼/슬퍼하지마/내일 네가 여행에서 돌아온다면/내일 내 가슴에 있는 돌이 꽃을 피운다면/내일 나는 너를 위해 달을/오전의 별을/꽃 정원을 살 것이다./그러나 나는, 오늘 혼자다./오, 빗방울처럼 흔들리는 나의 연인이여. - '외로움'(<비엔나에서 온 까시다들>, 압둘 와합 알바야티)

누구에게나 생의 캄캄한 시간은 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져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깊은 곳에서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넘어 또 길을 간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 그렇게 또 나를 세우고 다시 일어선다.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세우고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어내듯 짓누르던 아픔과 슬픔, 절망을 털어 버리고 길을 간다. 그렇게 또 살아간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나의 고통이 가치를 상실하는 것 뿐"이라고. 의미 있는 고통이라면, 견딜 수 있다. 아니 이유도 모른 채 고통 당한다고 생각하던 긴 시간 뒤에 그것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안다면, 훗날에라도 그 고통의 시간의 의미와 뜻을 발견한다면 가치 있는 고통이다.

어제부터 또 비가 내린다. 조용히 두두두둑... 일정한 간격, 일정한 리듬으로 처마 끝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괜찮다.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질려 있건만 비가 전달해 주는 노래는 귀에, 마음에 정겹고 편안하다.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다.

이 비가 거리를 적시고 사람들의 높고 낮은 지붕들을 적시고 풀잎을 적시고 풀잎 근처 흙을 두드리고 흙 속에 박힌 뿌리에 스며든다. 나무들이 비를 맞는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비를 맞는다. 흙 속에서 또 물줄기를 만들어 어디론가 비밀스럽게 조용히 냇물을 만들고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리라.

오랜만에 내 감성의 문을 가만 가만히 빗물처럼 두드리는 책을 읽었다. 모처럼 상념을 붙들고 머뭇거리며 잠시 마음의 나무 아래 앉아 쉼표를 찍는 시간이다. 오랜만이다. 10년 만에 발표한 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공지영/황금나침반)이었다.

책 속에는 저자의 삶 가운데 서툴러서 긁힌 마음의 생채기와 그에 대한 고백, 자기성찰과 연륜을 통한 성숙을 만나 볼 수 있다. 아프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 흔적을 가파른 숨결 잦아진 조금은 더 낮은 보폭으로 조용히 내리는 빗물 같은 아프게 여물어진 언어로 만나 볼 수 있다.

이 책의 소제목의 글마다 앞에는 주옥 같은 시 한편씩을 소개하고 있다. 이원규의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먼 저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 내면 깊숙한 곳의 물기를 건드리고 결국에는 내면 가득 흥건히 적시고야 마는 '시'들.

글쓰기가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치유하고 있는 영혼을 질료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저자의 내면의 기록이 산문 형식으로 실려 있다. 김남주 시인의 시 역시 뭐라 형용할 길 없는 슬픈 감동을 준다. 한편의 드라마나 소설을 읽는 것 보다 더 진하게 와 닿는다.

잡아보라고/손목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그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오/옥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이리 꼬시고 저리 꼬시고/별의별 수작을 다 해도/입술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입으로 속삭였다오 면회장에 와서/기다리겠어요 건강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15년 징역살이를 다 하고 나면/내 나이 마흔아홉 살/이런 사람 기다려 무엇에 쓰겠다는 것일까.- '철창에 기대어' 중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나를 살아 있게 한다./감옥 속의 겨울 속의 나를/머리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가슴 가득히/뜨건 피 돌게 한다./그대만이/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중


저자는 이 시를 소개하면서 '사랑의 포로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만인을 위해' 싸울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해보지 않은 사람이 갇힌 이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을까요'하고 묻고 있다. 사랑으로, 사람으로 상처받기도 했지만 사랑이 없다고 부인하기를 거부하는 저자의 마음을 만난다. 그리고 누군가를 그토록 깊이 사랑했었던가 하고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작은 사랑 없이 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시인 안도현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단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라고 했던 것처럼 사랑했었던가. 소화 데레사가 숨을 거두기 전에 '님을 보거든 전해다오.../내가 그대로 인해 병들었다고/...주님 제가 드릴 것은 찢겨진 마음뿐./찢겨진 마음뿐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했었던가.

사랑은 상처받는 것을 진정 허락하는 것이다. 잠시, 쉼표를 찍으며 조용히 그리고 낮게 내리는 빗방울처럼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 봄비 오시는 날... 마음의 쉼표를 찍었던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실린 시 한편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근심으로 가득 차/멈춰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그것이 무슨 인생이랴/.../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들로 가득 찬/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미인의 눈길에 돌아서서 그 아름다운/발걸음을 지켜볼 시간이 없다면/눈에서 시작된 미소가/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가련한 인생이 아니랴 근심으로 가득 차/멈춰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멈춰서서 바라볼 수 없다면',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해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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