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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006년이다. 이는 전 세계인이 함께 쓰는 보편적인 연대 표기이다. 반면 일본은 그 나라만의 독특한 셈법이 하나 더 있다. 천황의 명칭을 딴 연호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 올해는 헤이세이 18년으로 통한다.

헤이세이 이전은 쇼와기이다. 묘하게도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1989년 세상을 떠난 히로히토 천황이 제위한 기간은 60여 년이었다. 이 60년의 긴 세월에는 일본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굴곡이 응축되어 있다.

쇼와기는 1945년 패전과 더불어 종식되었어야 온당했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더불어 쇼와 천황은 명백한 전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맥아더 사령관은 점령 통치의 일환으로 쇼와기를 연장시켰고, 천황은 그 대신 '인간선언'을 하며 더이상 신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일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쇼와는 일본 번영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죽자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진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에게 '쇼와기'는 애증이 교차하는 미묘한 시기이다. 1945년을 기점으로 한쪽에는 군국주의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쇼와가 있는 반면, 그 반대편에는 경제 번영의 향수를 자극시키는 풍요로운 쇼와가 있다.

제거되었던 군부의 부활 움직임

최근 일본의 동향을 보고 있노라면 '쇼와 전기의 부활'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 유난히 눈에 띈다.

1945년 이전과 이후의 일본을 나누는 가장 날카로운 경계선은 군부의 위상이었다. 점령 통치를 독점했던 미국은 일본의 군부를 철저하게 제거했던 반면, 제국주의 시대의 관료와 정치가, 그리고 경제인들은 차례차례 복권시켰다.

이처럼 군부를 제외한 지배체제의 연속성은 전시기의 '총동원 체제' 전후에도 이어지는 물적 토대가 되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전후 일본의 '회사 인간'들은 국가의 경제 번영에 총동원되었다. 일본의 한 급진적 평론가는 1970년대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조어 '과로사'를 가리켜 '전후의 카미카제'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런데 제국주의 일본에서 유일하게 제거되었던 그 군부가 무서운 기세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5월 3일 워싱턴에서의 2+2 회담 최종 합의문 발표는 지난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미군과 자위대가 하나가 되는 군사통합 계획이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의미했다. 두 나라의 군사 사령부마저 하나로 통합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단일 군대 체제로 재편되는 것이다.

이제 일본 자위대는 자국의 이익이 관계되는 지역이라면 미군과 함께 군사 활동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선언했다. 예전에도 일본은 '이익선'이라는 개념으로 조선을 식민화했고, 대륙을 침략했었다.

일본 정치를 움직이는 전범 정치인들의 후예들

정계의 인적 구성 면에서도 쇼와의 부활은 이미 진행형이다.

일본의 대외 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 아베 관방장관, 아소 외무장관 등은 모두 쇼와 전기 인물들의 직계 후손들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는 중의원 부의장과 장관직을 수행하며 쇼와 파시즘의 중책을 담당했던 사람이고, 아베 장관의 외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기시 노부스케이다.

그는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 경영을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애초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을 만큼 전쟁에 깊숙이 가담했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전후 총리직까지 역임했다. 아소의 외할아버지도 전후 일본의 초대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로, 이 사람 역시 만주국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우익 인사였다. 즉 고이즈미, 아베, 아소 모두가 30년대, 즉 쇼와 전기 군국주의 일본의 대륙 침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인들의 후예들인 것이다.

법률적, 제도적 측면에서도 쇼와 전기로의 회귀가 두드러진다.

'16세 이상 모든 외국인 지문을 채취하고 얼굴 사진 찍는 법안' 통과

어제(18일) 일본의 중의원은 새로운 출입국 관리법을 통과시켰다. 앞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16세 이상의 모든 외국인은 지문을 채취하고 얼굴 사진을 찍어야만 한다. 일본 내부에서도 컴퓨터와 신체 정보를 이용한 감시 사회로의 전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으나, 테러의 사전 방지라는 대의명분에 맥없이 밀리고 말았다.

이는 곧 신설될 것으로 보이는 '공모죄'와 더불어 1920년대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을 떠오르게 한다. 국가보안법의 원조인 치안유지법은 제국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악법이었다. 범죄 행위의 직접 가담이 아닌 '공모'만으로도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개인의 '사상'을 검열하겠다는 것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대단히 농후하다. 쇼와 초기의 치안 유지법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혁명 운동을 차단하고 테러 분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법률이었음을 각별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평화 헌법과 더불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를 상징했던 교육 기본법 역시 개정 초읽기에 들어가 있다. 전전의 맹목적 국가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했던 교육기본법은 '교육의 헌법'이라 불렸을 만큼 전후 일본을 틀 짓는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애국심'이라는 단어 하나가 격렬한 논란이 되었을 만큼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어휘 사용의 애매한 타협 속에서 결국 통과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인보다는 국가를 강조하고, 자유보다는 의무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이 역시 과거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후 일본'의 법률적 제도적 근간은 착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아찔한 것은, '전후 일본'을 대신한 새로운 일본의 모습이 점점 더 쇼와 전기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년부터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4월 29일은 현재의 '녹색의 날'에서 '쇼와의 날'로 변경된다. 국가의 공식 휴일로서 '쇼와'를 기념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일본은 쇼와기로 돌아가는 것일까?

모리 전 수상은 2000년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후 히로히토 천황이 '인간 선언'을 했으니, 일본이 마지막으로 신의 나라였던 시기는 쇼와 전기, 즉 1930∼40년대이다. 그 시기 일본은 신과 더불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몽상 속에서 맹목적인 전쟁을 수행했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오늘의 일본인들은 당시의 '강한 일본'에 향수를 느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몽상은 '동아시아의 악몽'이었고, 그 악몽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일본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절실한 과제이다.

덧붙이는 글 | 일본 교민지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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