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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말했다. "결혼하기로 했든 하지 않기로 했든 상관없다. 그 어느 쪽이든 당신은 후회하게 될 테니까." 최근 나온 두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와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은 '웬수 같은 결혼'에 대한 재미있는 우화다.

"결혼이란 것이 무엇을 바꿔주나?"고 물었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두 소설은 묻는다. 결혼이 뭐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지금 '결혼'은 고래도 미치게 하지 않나? 왜 꼭 한 남자, 한 여자와 살아야 하는데?

아내는 결혼하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은 왜?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상한 부부 이야기다. 아니 결혼 이야기다. 일 때문에 만나 사랑에 빠진 '나'는 결혼이 싫다는 인아에게 애걸복걸해 겨우 결혼했다. 그녀의 사생활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겠다, 맹세까지 했다. 다른 남자와 자는 것도 존중하겠단 맹세였다.

ⓒ 문이당
어려울 거 없을 줄 알았다. 연애 기간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녀 없이 사느니, 그게 낫다고 마음 정리 끝났으니까.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가끔씩 아내의 늦은 귀가가 뜻하는 바 때문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내가 어느 날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거기까지 참을 수 있었다. 잤다는 말도 참을 수 있었다. 아내가 또 말했다.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그렇다고 '나' 하고 이혼하고 싶지도 않다나? 결국 아내는 '나'와 이혼하지도 않고, 그 놈과 결혼했다. 아내는 행복했다. 주인공 '나'는? 질투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칼을 들고 그놈의 배를 '푸욱' 쑤실 만치 미치지도 않았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결국 일부일처제가 일처다부제에 귀의한 남자 이야기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나는 어떻게 마누라가 오쟁이 진 남편이 됐나, 나는 어떻게 두 집 살림하는 마누라의 남편으로 살아남았나,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나, 이러며 '결혼'이란 샌드백을 툭툭 친다. 온갖 사회학자와 온갖 사회적 근거를 들어 뚝심 있게 말한다. 축구 이야길 하며, 축구 선수 공 놀리듯이 결혼제도에 대해 조롱한다. '일부일처제'에 대해 조롱한다. 농담처럼 도발한다.

"왜 꼭 다른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는 정상이라며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중략) 구성원이 덜 있건 더 있건 가정이면 그냥 다 가정인 거야"라는 인아의 말은 의미가 심장을 콕 찌르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가 동의하여 결정한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라면 오히려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살아가는 수많은 부부들이다"고 말하며 묻는다. 뭐가 문제인가? 왜 안 되는가? 왜 꼭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는 결혼이어야만 하는가?

▲ 역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 영화 <쥴 앤 짐>(1962년). 셋은 행복했다.
ⓒ 쥴 앤 짐
결국 소설 속 '나'는 생각한다. "세 명 이상이 동시에 결혼을 하고 함께 살면서 성관계 및 자녀 양육까지 공유하는 집단혼"을 이루며 산다는 폴리아모리스트들에 대하여. 이들이 꿈꾸는 "성적 평등, 소유욕 없는 관계 그리고 배우자 간의 친밀성과 진정한 사랑을 모두 아우른다"는 집단혼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지만 유토피아는 무슨 유토피아? 현실은 말했다. 미국에서 집단혼에 대한 연구 결과, 겨우 7퍼센트만이 5년 이상 지속되었다. 당시 일반적인 결혼 생활은 되레 평균 5년이었다. 역시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나?

주인공 '나'는 말한다. "어쩌면 문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결혼 자체인지도 모른다. 모노가미건, 폴리가미건, 심지어 수양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폴리피델리티에서조차 결혼 생활을 통해 유토피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이 책은 오도독 뼈가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농담으로 묻는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은 왜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않나? 이들은 왜 계속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나? 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돼버리나? 혹시 '일부일처제'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가? 리콜이 필요한 건 아닌가?

집단혼 시절은 햇빛 찬란한 나날이었나?

조선희의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에 실린 표제작 단편 '햇빛 찬란한 나날'은 '집단혼'을 경험한 여자 이야기다. <아내와 결혼했다>가 막 시작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노드라마라면, <햇빛 찬란한 나날>은 오래 전 한 번 해봤던 이가 보여주는 흑백 드라마다. 그리고 이번엔 '본게마인샤프트'다. 독일에 있다는 주거공동체. 한 여자가 젊은 날을 여기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 실천문학사
주인공 '나'가 우연히 만난 여자는, 젊어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는 대신" 훌쩍 서울을 떠났다. 독일로 간 그녀가 만난 게 '본게마인샤프트'였다. 그곳은 별세계였다. 호기심으로 갔던 그녀는 거기서 남자를 만나고 결혼한다.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그곳은 모든 것이 공동인 데였다. 특히 "섹스가 그 모든 공유의 근원이자 핵심"이었다. 그곳에서 그녀 역시 남편을 공유하며 17년을 살았다.

그녀가 그곳에 대해 쓴 회고담에서 주인공 '나'는 "내 이상의 주소 하나를 발견했다.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버젓이 현실의 세계에 문패를 내걸고 있는 주소"였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주말이면 다 같이 행복한 축제를 벌이는 곳. 소유를 놓고 싸우지 않는 곳. "사랑은 즉흥성이 생명"이라고 믿으며 그걸 실천하는 곳.

하지만 '나'가 들여다본 현실은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번엔 공유하지 않는 한 남자와 재혼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였다.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는 모든 걸 정리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본게마인샤프트에서 그녀의 실패에 대해 '나'는 말한다. "질투는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는 늘 남편의 애인에 대한 질투 때문에 괴로워했고 결국 그의 자존심도 결혼생활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욕망은 논리로 재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게마인샤프트라는 것도 논리로 설계한 이상의 공간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농담처럼 판타지를 꿈꾼다면, <햇빛 찬란한 나날>은 진담처럼 이상을 슬퍼한다. 이상이 실현된 현실의 몰락을 슬퍼한다. "이념이나 명분이란 것도 문서 위의 판타지일 뿐"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상적인 결혼생활이란 뭘까. 있기나 한 걸까? 아니, 정말 없는 걸까?

<햇빛 찬란한 나날>은 말한다. "누구에게나 이상으로 빛나는 청춘이 있는 건 아니다. 이상을 품는 것도 재능이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지만, 누구나 꿈을 꾸는 건 아니다. 결혼의 이상을 품는 것도 재능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장편소설

박현욱 지음, 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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