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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가 결혼했다> 겉그림
ⓒ 문이당
제목은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집약시켜놓았다. 이보다 더 간결하게 많은 의미를 내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덕훈은 인아에게 반한다. 처음에는 낮은 점수였지만 차츰 인아를 알아가면서 점수가 점점 올라가고 급기야 100점도 초월할 만큼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눈에 띠는 미인도 아니지만 사랑은 껍질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어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일 게다. '축구'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서로를 더 가까이 느끼도록 촉매제로 작용되었고 둘은 환상적인 커플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인아의 자유주의적인 사랑관에 있었다.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남자'처럼 인아도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유동적이어서 지금 사랑한다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며, 오늘의 사랑과 내일의 사랑, 그 대상이 유일하지 않음을 인아는 연애시절부터 꾸준히 덕훈에게 이입시키려 노력했다.

흔히들 결혼이란 연애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기꺼이 동의한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녀를 연애의 무덤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녀의 다른 연애들을 죄다 무덤 속에 묻어 버리려면 결혼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 본문 중에서

'우리 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갈래요?'로부터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기에 덕훈은 연애 시절 '커피 한 잔'한 그녀의 대상들에 언제나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결혼이다. 그래도 결혼을 하면 그녀의 사랑관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므로 결혼하면 오로지 자신만이 인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며 결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인아를 꼬드겨 결혼하기에 이른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의 섞임이 듣기 좋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같이 빨래를 널고, 빨래가 다 마르면 같이 빨래를 개킨다. 할 일이 없으면 소파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TV를 본다. 아내가 책이라도 읽으면 또 그 옆에 누워 빈둥거린다.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이란 로또 같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옆자리에, 아내의 무릎에 있다. -본문 중에서

신혼의 달콤함이 묻어나는 일상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쯤은 본 듯한 장면들이 환기되지만, 이처럼 갈등 없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점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처럼 인아의 독특한 사랑법은 언제나 유효했다. 결혼 후에도 인아는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없었다. 드디어 덕훈에게 고백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덕훈은 분노한다. 그저 몰래 만나는 것이 아니라 또 결혼을 하겠다니. 자신과 이혼하고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몸으로 다시 결혼이라니? 황당하다. 그러나 인아를 떠나보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덕훈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혼하겠다는 인아의 청을 들어주고 만다. 반쪽이라도 좋으니 인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덕훈보다 세 살 어린 인아, 인아 보다 두 살이 어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그러니까 덕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재경을 덕훈은 그놈 혹은 나쁜 놈으로 대신해 불렀다.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어패가 있지만 인아의 사랑은 보편적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납득되기 어렵다.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고 너끈하게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다니 인아의 파워풀한 능력은 놀라움 그 자체다. 어차피 소설인데 더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파격적이다.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가 누군지 확실치 않다. 인아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줄 수 없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원이 인아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손녀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아버지는 누가 되든 상관없다는 듯 소설은 철저히 인아의 지위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소설은 유쾌한 반란을 꿈꾼다. 아버지가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떤가. 한 가정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꼭 1명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반대의 가정도 가능하다 아버지가 없을 수도 있고 어머니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손 가정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할어버지와 할머니와 살면 과잉 가정'이란 말인가. 가족 구성원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핵가족과 확대가족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듯'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편견의 시선을 가지는 것은 명백히 인권 침해적 행동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과연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천편일률적인 결혼에 대한 반란? 사실 축구에 그다지 해박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는 독자의 경우 축구 이야기 부분에서는 은근한 피로가 몰려 올 것이다. 그래도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읽는 사람을 흡인하는 마력에 대해 심사를 맡은 이들의 한결 같은 찬사가 수록되어 있지만 결코 주례사 비평이 아니었다.

소설의 도발적인 주제도 그렇지만 저자의 마르지 않는 유쾌한 언어의 조합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시종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제2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은 2006년 3월의 끄트머리에 읽은 소설 중 단연 돋보이는 책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장편소설

박현욱 지음, 문학동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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