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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사가 죽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온 고통은 고독이었다. 혼자 널빤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버티기엔 한결 수월했다. 균형만 잘 맞추면 널빤지를 뗏목 삼아 올라가 버틸 수도 있었다. 육체의 고통은 나아졌지만 정신적은 고독과 외로움은 오히려 더해졌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광막한 바다와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풍경이 늘 시야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어떤 해류를 타고 흘러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동해 한가운데 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근처에 섬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망망대해 한 가운데 떠 있는 것이다.

이 불행을 당한 가운데서도 왕신복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다. 만약 지금이 한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몇 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동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보통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사절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출발한다. 반대로 일본에서 발해로 가는 배는 한 여름에 운항을 한다. 발해 사절이 일본에 올 때는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서 계절풍을 타고, 귀국할 때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남쪽 바람을 탄 채 돛을 달고 항해하는 것이다. 계추극랭(季秋極冷)에서 맹동점한(孟冬漸寒)의 때에 남경남해부의 토호포를 출발하는 게 관례였다. 일본에서도 고마오오야마(高麗大山)가 이끄는 사절단이 올해 봄에 노오토(能登) 호를 타고 발해에 도착했다.

관례대로라면 일본으로 향하는 사절단은 늦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신속한 답변을 요구해왔고, 문왕은 시간을 끌다가 고심 끝에 여름에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띄웠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향한 수십 차례의 항해 중에 여름에 출발한 경우는 두 번밖에 없을 정도로 이번 항해는 이례적이었다. 하긴 오랫동안의 관례를 깨고 문관인 자신이 이번 사절단의 책임을 진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이번 항해가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바다에 빠진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었다. 족히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혹은, 그들을 피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생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이번 항해를 위해 혹독한 수영연습을 했던 터였다. 웬만한 파도가 덮쳐와도 바다 위에서 몇 식경은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는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켜 널빤지에 기대었다. 상체는 널빤지 위로 올라와 있고, 배꼽 밑의 하체는 바닷물에 잠겨 있다. 그는 온몸의 힘을 뺀 채 가늘게 호흡했다. 복식 호흡을 하며 체력을 비축했다.

예리한 칼날로 깎아낸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울렁거리는 속을 왕신복은 간신히 참아냈다. 비장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토해내면 공복감이 커지고 체력이 소모될 것이다. 가능한 오랫동안 버틸 체력이 필요했다. 갈증과 허기는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이대로 널빤지만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은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는 게 급했다.

다행히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잔잔했다. 널빤지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자리에 떠 있었다. 왕신복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물방울 수십 개가 한꺼번에 햇살 속으로 튀어 올랐다. 그 깨진 해면 깊숙이 빨려들 듯 끌려 들어가자 강한 햇살로 인해 바다 속에서도 시야가 확보되었다. 바로 얼굴 앞으로 물거품이 풍선처럼 해면을 향해 떠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흡사 해명을 박차고 푸른 창공의 하늘까지라도 둥둥 떠올라갈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더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물거품들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한참 밑으로 내려가자 바위로 뒤덮인 바닥이 보였다. 이곳은 생각보다 수심이 얕은 곳이었다. 바위 한쪽 끝을 손으로 잡고 그 틈 사이를 뒤졌다. 그러자 손끝으로 뭉텅하게 잡히는 게 있었다. 그것은 하얀 색깔을 갖고 있었고, 물고기의 아가미 같은 굵은 홈 줄을 여 남은 개 새기고 있었다. 커다란 조개였다. 까칠까칠한 석회의 껍질 한쪽으로 검푸른 해초가 돋아나 있었다.

왕신복은 한 손으로 그 조개를 세게 내리쳤다.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대신에 바스러진 조개껍데기의 조각이 부옇게 물속을 날았다. 껍데기는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그러자 깨져 벌어진 속으로 살아 꼼지락거리는 내용물이 너덜너덜 드러났다. 왕신복은 그 조갯살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입속에 밀어 넣었다. 숨을 쉬지 못해 이빨로 씹지도 않고 곧장 목으로 넘겼다.

물거품이 수만 개 깨지며 그를 따라 물 위로 떠올라 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는 밝아 눈이 부신 해면으로 떠올랐다. 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빤지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당황했다. 다시 주위를 살피자 해류를 따라 저만큼 멀어져 가는 게 보였다.

왕신복은 한 손에 물고기를 움켜쥔 채 손과 발을 뻗어 수영을 했다. 이미 잠수를 하느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지만 그는 남은 힘을 다해 널빤지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손을 내밀어 간신히 널빤지에 올랐다. 땀과 바닷물이 뒤범벅이 되어 그의 눈으로 들어갔다.

왕신복은 널빤지에 간신히 올라가 균형을 잡고 드러누웠다. 힘들게 배운 수영솜씨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몇 번이나 수장되고도 남았었다. 새삼 아버지 왕영명의 예지력에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거 http://blog.ohmynews.com/novel에 오시면 소설 "762년"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적 자료, 그리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들 찾아오셔서 소설과 역사적 사료의 만남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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