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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문득 자신 대신 물에 빠져 들어간 양태사(楊泰師)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태사는 어제 밤까지 자신과 함께 버티다가 스스로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문짝 크기의 널빤지는 두 사람이 붙들고 있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나 작았다. 두 사람이 붙들고 있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물에 반쯤 잠기며 몸의 중심 또한 바다 속으로 잠겨들었다. 턱까지 바닷물이 잠기며 겨우 코로 숨을 쉴 정도였다.

몇 식 경 정도는 간신히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표류생활이 며칠 동안 이어진다면 이 널빤지에 두 목숨을 의지하기엔 무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널빤지를 잡은 손에 힘을 빼고 손발을 허우적 거리며 상대방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일시적인 방법일 뿐이었다.

어차피 둘 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할 바에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버틸 때까지 버틸 요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그들이 구조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졌다. 장기적으로 생각해야할 처지였다.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부지하여 지나가는 배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랫동안 널빤지를 잡고 버텨야 한다.

양태사는 바닷물을 한 모금 입에 넣었다. 바닷물로 입안과 목을 적시고는 뱉어냈다. 그도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풀어 헤쳐진 긴 머리칼이 바닷물에 적셔져 있고, 입술은 말라비틀어진 데다 소금기가 엉겨붙어 허옇게 변해 있었다. 문득 양태사의 눈가에 스치는 기묘한 빛이 번득였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문을 떼었다.

"좌윤 어른, 제가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그 귀중한 목숨을 잘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왕신복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린 반드시 같이 살아가야 하네."
"아닙니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둘 다 목숨을 부지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좌윤 어른이라도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 자넨 나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자넬 죽이고 내가 살순 없어."

갈증이 나고 기운이 빠진 고통스런 가운데도 양태사는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른의 목숨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어른의 어깨에는 우리 발해, 아니 이 삼한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왕신복은 미간을 좁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떠오르며 엄청난 무게의 중압감이 가슴을 찍어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널빤지를 손으로 붙든 채 양태사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래서 초월한 듯한 눈빛이 바닷물을 담고 번득이고 있었다. 왕신복은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놓았다.

"절대 딴 생각하면 안되네."

그렇게 단단히 일러놓고는 한참 동안 양태사를 지켜보았다. 날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른 새벽이라 아침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하늘과 바다 빛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검은색에 검은색을 덧칠한 듯한 암흑의 세계. 꼬박 밤을 새 피로가 몰려왔다. 근육은 아직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각이 무디어지며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나른해졌다.

왕신복은 널빤지를 세게 움켜 쥔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자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한 손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래도 정신이 들지 않자 바닷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러자 정신이 조금 명징해지는 듯했다. 왕신복은 숨을 깊게 내쉬며 앞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얼른 주위를 살폈다. 함께 있던 양태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봐! 부사(副詞)!"

그렇게 외쳐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언뜻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바다 속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물 밖으로 나오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숨이 턱에까지 차 올랐다.

양태사가 사라졌다. 아니 일부러 바다 속에 뛰어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널빤지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그를 따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세게 악물며 얼굴 한쪽 근육을 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양태사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목숨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 소중한 목숨을 버렸다. 그 자신이란 개인 정당성 좌윤 왕신복이 아니라 발해와 이 삼한 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문득 양태사의 그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거 http://blog.ohmynews.com/novel에 오시면 소설 "762년"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적 자료, 그리고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들 찾아오셔서 소설과 역사적 사료의 만남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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