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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기자가 물었다.

"16년 전부터 북한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왔다면서 미국은 왜 지금에야 문제 삼는가."

데이비드 애셔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선임자문관의 대답은 이랬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평양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위폐 문제를 거론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범죄 행위가 날로 늘어나면서 미국은 5, 6년 전부터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 미국인은 범죄행위에 강경파·협상파의 구별이 없다. 북한과 한국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애셔의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가 깔려 있다.

첫째, 평양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던 빌 클린턴 정부의 태도를 언급한 부분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최근의 대북 압박엔 북한을 자극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 점을 희석시키기 위해 위폐 제조·유통이 범죄행위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둘째, 명심하라고 촉구한 대상에 북한뿐 아니라 한국도 포함됐다는 점이다. 애셔는 "한국은 북한의 범죄행위에 눈감으면서까지 햇볕정책을 계속하면 안 된다"는 말도 남겼다.

별 볼 일 없는 전직 하급관리의 말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애셔뿐만이 아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한결같이 북한의 위폐 제조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고, 데이비스 셈슨 미 상무부 부장관은 남북경제협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그럼 미국이 자극과 압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뭘까? 9·19 공동선언의 무력화를 바란다는 얘기야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니까 생략하자.

그것 외에 주목할 점이 있다. 애셔는 "미국인은 범죄행위에 강경파·협상파의 구별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이라크전 책임 문제로 곤경에 처한 부시 미 대통령의 탈출구 약도가 그려져 있다.

선거 앞두고 '공공의 적' 필요한 공화당... 위폐는 최고의 소재

내분에 빠진 공화당파를 단결시키고 민주당파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공공의 적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 말이다. 9·19 공동선언으로 적대성이 약화된 북한을 다시 키우는데 위폐처럼 좋은 소재는 없다. 위폐 제조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는 범죄행위다. 게다가 자기 나라 화폐를 갖고 장난 친 것인 만큼 국민 공분도 끌어올릴 수 있다.

상황이 악성인 이유가 또 있다. 미국은 내년 말에 중간선거를 치른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는 선거다. 물론 중간선거의 최대 쟁점은 이라크전을 포함한 반테러전이 될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위폐를 만지작거리는 기간은 짧게 잡아도 1년이다. 이 기간 동안 6자회담은 교착국면을 벗어날 수 없다. 더 나아가 남북경제협력마저 제동이 걸릴지도 모른다. 당장 미 전략물자와 연동돼 있어 미국의 양해가 필수적인 개성공단 건설사업이 꼬일 수 있다.

이 같은 요인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여권에게는 악재다. 반면 야권, 특히 한나라당에겐 호재다. 지방선거 특성상 크게 주요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선에서 쟁점을 만든다는 차원에서라도 포석을 깔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대북정책을 총괄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열린우리당으로 돌아가 의장을 맡게 된다면 정치쟁점화할 수 있는 고리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밑져야 본전인 싸움인 것이다.

국내에선 벌써부터 쟁점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는 오늘자에서 국정원이 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위폐 제조 실태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위폐를 유통시킨 건 거의 확실하나 직접 제조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 뿐인가. 현 정부를 '건달정부'라고 비판한 바 있는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북한 전문 뉴스사이트인 <데일리엔케이>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므로 6·15 남북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9·19 공동선언으로 잦아드는가 싶던 북한 문제가 위폐 문제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 덕분에 미국의 우파뿐 아니라 국내의 대북강경론자들도 살아나고 있다. 북한 위폐 문제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대북강경세력이 단결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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