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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도심 중앙의 황지 연못. 도시화 하기 전 황지 연못 부근은 농사도 못 짓는 황량한 습지였고 못의 넓이도 지금의 두 배 이상 컸다고 공원에 나온 태백의 노인들은 기억한다.
태백 도심 중앙의 황지 연못. 도시화 하기 전 황지 연못 부근은 농사도 못 짓는 황량한 습지였고 못의 넓이도 지금의 두 배 이상 컸다고 공원에 나온 태백의 노인들은 기억한다. ⓒ 태백시
황당하게 들리는 전설이라도 그 줄거리가 공연히 생기는 일은 없다. 사실의 과장이거나 미세한 사건의 확대 포장은 있어도 절대로 마른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억지 전설이란 없다. 설화나 전설엔 반드시 이유와 근원 사건이 있다.

발원지 부근에 외면하기 힘든 묵직한 전설 두 개가 같이 흐르는 강이 낙동강이다. 각종 전설의 고정 주연배우인 용(龍)이 출연해서 몸을 뒤틀며 승천했거나 아직 살고 있다는 얘기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강원도 태백시 '황지 연못'과 '구문소'의 전설은 줄거리 전개가 다분히 현실적이다. 그 전설 중의 하나는 전설이 현실로 되었다.

노랭이 황 부자 집이 가라앉은 황지 연못

태백시의 옛 이름 '황지리(黃池里)'의 근원이 된 황 부자 전설은 잘 알려진 대로다. 집을 찾아온 탁발승에게 시주는커녕 인분 바가지를 들이민 시아버지 몰래 됫박 쌀을 시주하며 대신 사과한 며느리가, 어떤 소리가 들려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스님의 당부를 어기고 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시댁을 뒤돌아보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때 황 부자집이 가라앉은 곳이 황지란 얘기가 전설의 결론인데, 황지와 가라앉은 황 부자 집을 현실감 있게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태백(즉 황지)이 '많은 인구가 살 만한 곳(居萬戶地)'으로 물산이 풍족한 곳이라던 옛 기록을 보면, 부를 축적하기만 할 뿐 베풀 줄 모르고 살던 지역 부호가 황지 연못과 관련된 천재지변으로 졸지에 몰락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원에 나온 태백 노인들에 의하면 황지 연못은 매우 신성시되던 '영험있는 연못'으로 못된 부자에게 중벌을 내릴 신통력이 "충분히 있다"고 믿는단다.

언젠가 답사 때에 황지 전설을 듣고 난 한 학생이 황지를 '황당한 연못이지'라며 신세대식 이행시를 짓던 것을 필자는 단순한 재미 이상으로 귀담아 들었었다. 옛 지리서에 황지를 '하늘의 못'이란 뜻으로 '천황(天潢)'이라 기록한 것으로 봐서 상당한 양의 물이 일년내내 펑펑 솟아나고 그 물이 곧 식수였으니, 마을 사람들은 황지에 일종의 경외심까지 느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옛 지도들의 축척 개념이 애매하긴 하지만 작은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황지는 어김없이 표기되어 있다. 외지에서도 황지를 신성시한 증거다. 기우제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지낸다. 그러나 이 지방에선 가뭄이 들면 황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역시 황지 못을 신성히 여긴 좋은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황지에서 솟는 물을 땅에서 솟는 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낙동강은 하늘에서 떨어져 흐르는 물이 된다. 즉 하늘에서 시작한 강이란 얘기다. 하늘의 연못 황지, 하늘에서 시작한 강 낙동강, 그럼 낙동강은 자연스럽게 매우 신령스러운 하늘의 강이 된다. 이 얼마나 절묘한 신비감의 헌정인가. 대체 우리 민족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물이 솟는 지점에서 낙동 하류 방향으로 본 황지. 낙동강 512Km의 시작은 이렇게 조용하다.
물이 솟는 지점에서 낙동 하류 방향으로 본 황지. 낙동강 512Km의 시작은 이렇게 조용하다. ⓒ 곽교신
이즈음엔 황지(潢池)에서 삼수 변을 떨구고 황지(黃池)로 쓴다. '천황(天潢)'에서 앞의 '하늘 천'은 빼고 뒤에다 '연못 지'를 붙였으니, '웅덩이 황'의 삼수 변을 지워 황 부자의 성씨 황(黃)으로 일치시켜 전설과 맞추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전설을 근거로 법정 싸움을 한 구문소 용왕석

전설과 현실이 함께 뭉쳐 흐르는 낙동강 상류는 구문소에 이르러서는 전설이 흐르는 강의 절정을 이룬다. 황지 물이 하류 쪽으로 10Km 쯤 흐르다가 만나는 구문소(求門沼)는 전설이 현실이 된 곳이다.

'구멍'의 옛말인 '구무'에서 이름이 유래된 구문소는 태백산맥의 한 산줄기를 물이 뚫고 지나가는 형상으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만고의 진리가 구문소에서는 여지없이 깨진다. 도강산맥(渡江山脈)이라는 용어는 구문소의 절경 앞에서는 표현이 오히려 건조하다.

지금까지의 잔잔한 물흐름 태도를 갑자기 바꿔 구문소 물구멍을 향해 거품을 품으며 기세를 드높이는 낙동 최상류. 물구멍은 폭과 높이가 20~30미터에 달한다.
지금까지의 잔잔한 물흐름 태도를 갑자기 바꿔 구문소 물구멍을 향해 거품을 품으며 기세를 드높이는 낙동 최상류. 물구멍은 폭과 높이가 20~30미터에 달한다. ⓒ 곽교신
발원지 황지에서의 용출량은 많되 그 흐름이 매우 잔잔했던 것과 달리 구문소에 이르러서 낙동강의 최상류는 맹렬한 기세로 석굴을 향해 돌진한다. 석회암이 지하수에 녹아 지하 석회동굴을 만들었듯, 석회암질의 바위산이 수억 년 전에 물에 뚫려 커다란 물구멍이 생겼고 그리로 낙동강 상류가 통과하는 이 특이한 지형은 '물이 산을 넘어버린'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지형이다.

그 희소성은 당연히 신비감에 쌓인 전설을 만들었다. 놀랍게도 그 전설은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 모를 현대에 와서 문중 간 다툼이 되어 전설을 근거로 법정 다툼을 벌였으니 그 송사는 현대에 지어진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옛날에 구문소 근처에 살던 효심 깊은 엄종한이란 사람이 우연히 구문소 물 밑에 있다는 용궁을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용궁석'이 조화를 부려 가난했던 엄씨네가 큰 부자가 되었는데, 사위인 조씨가 용궁석을 가져가자 엄씨 집안은 몰락하고 조씨 집안은 크게 흥했다는 전설이다.

엄씨 집안이 아직도 가세가 곤궁한 것은 용궁석을 잃은 때문이라고 믿은 엄씨 후손들이, 전설의 효험대로 용궁석을 가져가 아직도 안동에서 부자로 사는 조씨의 후손들을 상대로 용궁석을 돌려받기 위한 다툼을 벌였다. 이에 조씨 집안은 엄씨 집안의 억지 횡포라며 안동 법원에 송사를 걸었다. 그야말로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여 법정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은 조씨 집안 어르신의 지혜로운 해석으로 소를 취하하며 일단 송사는 거두었다.

하류 쪽에서 본 구문소. 물구멍을 통과하자마자 강물은 언제였냐는듯 다시 조용하다. 왼쪽의 터널은 일제가 뚫어놓은 차량 통행로.
하류 쪽에서 본 구문소. 물구멍을 통과하자마자 강물은 언제였냐는듯 다시 조용하다. 왼쪽의 터널은 일제가 뚫어놓은 차량 통행로. ⓒ 곽교신
이렇게 전설이 현실로 살아있는 구문소는 찾는 이들마다 감탄하도록 절경이거니와 지질학적으로도 중요한 과학적 증빙 자료를 많이 담고 있는 비장의 명소이다.

하늘에서 내려준 강, 낙동강

황지의 황 부자 전설이나 구문소의 전설은 황당하지만 외면하기 힘든 '사람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그 힘은 곧 낙동강이라는 큰 물이 시작되는 발원지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다. 큰 강의 발원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착은 가히 종교적이기까지하다. 그 믿음과 애착이 내 땅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인 것을 생각하면 황당하거나 밉지 않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 땅에서 힘차게 펑펑 솟아 흐르기 시작한 물 낙동강! 큰 산을 피할 곳이 없자 아예 뚫고 나가며 흐름을 멈추지 않는 물 낙동강! 이 낙동 최상류의 힘찬 기상을 우리는 그저 물흐름만으로 볼 것인가?

이기지 못할 고난은 없다고 묵묵히 후대에 가르치고 싶은 우리 선조들의 전설을 빌린 상상력은 현대의 어떤 위대한 작가라도 그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하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에 스며 다시 솟는 것이니 황지를 하늘의 물이 솟아나는 하늘의 못으로 본 것은 추상적이거나 감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매우 냉정한 현실적인 관찰일 수도 있다.

하늘에서 솟아 나와 산을 뚫고 흐르는 강 낙동강. 그 기운으로 낙동 하류의 신라는 한반도에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웠던 것이 아닐까. 흐름이 유장해 애잔하게 보이지만 태백산맥을 뚫고 지나가는 낙동 상류의 기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언의 힘찬 기운을 준다. 낙동 상류의 힘찬 도강산맥(渡江山脈) 기상 앞에서 이 땅에 사는 우린 어떤 고초와 무슨 불가능을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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