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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춘자,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 금순이, 순이, 딸돌이와 동생 연순이도 나왔다. 달막이 누나는 우리마을로 원정을 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췄다.
그날 춘자,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 금순이, 순이, 딸돌이와 동생 연순이도 나왔다. 달막이 누나는 우리마을로 원정을 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췄다. ⓒ 김용철

한가위 아침부터 마을 회관 앞이 북적였다

아이들도 형과 누나가 사온 운동화에 위 아래로 최신 유행하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이슬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마을회관 반공방첩 탑 옆에 파란 클로버가 지덕노체(智德勞體)와 함께 그려져 있다.

우리 동네에선 예전엔 남다른 풍습이 두 가지 있었다. 추석 때는 굳이 산소에 다녀오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는 송편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벌초하러가서 미리 절하고 오면 되고 송편은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외지로 나간 사람들이 배워온 측면이 강하다. 추수가 한 참이나 멀면 노는 게 일이었다.

나중에 크면 한 마리당 5~6kg이나 나가는 서양병아리를 기른 <4H클럽> 회원이 모자를 쓰고 나왔고 청년회와 재경향우회도 바삐 움직인다. 아침나절부터 세 곳에 달린 동그랗고 나팔처럼 생긴 스피커에선 마을 회관에서 내보낸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날이 날이니 만큼 새마을노래는 틀지 않았다.

십대 후반부터 30대 후반 청년들은 양복을 입고 연단을 설치하느라 여념이 없다. 망치질이 요란하다. 하얀 천막으로 앞쪽만 빼고 둘러쌌다.

아이들 차림은 어느 새 색동저고리와 마고자가 아닌 기성복이 주를 이뤘는데 청바지도 간혹 보인다. 도회지에서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 말투는 "그랬니?" "어쨌니?"로 시작하여 "됐다마 고마하자." 등 서울말과 부산 말씨가 뒤섞여 사투리 전시장 같았다.

오랜만에 쌀밥에 고깃국을 얼마나 든든하게 먹었는지 좀체 배가 꺼지지 않았다.

"쎄쎄, 하나 둘 셋"
"마이크 테스트! 아아-자알 들립니까?"

마이크를 톡톡 두들겨도 본다. 점심을 넘기고는 중고등학생들과 스물을 갓 넘은 선남선녀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주위를 맴돌다가 어느 집으론가 들어간다. 집집마다 돌며 술상을 받고 그들의 사랑과 우정을 한 스푼씩 나눠가진다.

상품도 대단했다. 1등은 흑백텔레비전, 2등은 쌀 한 가마였다. 하얀 솥과 플라스틱 소쿠리, 쌀 씻는 함지박, 양동이, 주전자, 국자, 한 되짜리 바가지 등을 가득 쌓아놓고 펄럭이는 종이에 시상 내역을 써 붙였다. 참가비는 2000원이다.

한없이 밝기만 하던 해가 무등산 쪽에 붉게 기웃거리고 있을 무렵 동산에 휘영청 보름달이 떠올랐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오른다. 제일 먼저 내 또래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고 어른들은 깔아둔 멍석에 앉는다. 마을 방송 몇 번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회관 앞마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들어찼다. 80여 호에 식구대로 나왔으니 400여 명에 이르렀다.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해자 엄마

광주에서 온 악단이 음악을 한번 연주하자 각본대로 성환이 형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지금부터 양지마을 콩쿨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수."

"짠짜라잔짠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뒤쪽엔 옆 마을 강례와 아랫마을 송단리에서도 원정을 왔다. 노래 잘하는 두어 명을 파견하여 상품을 싹쓸이할 생각에서다. 어젠 우리 마을에서 송단으로 사람을 뽑아 보내질 않았던가.

"그럼 오늘 심사위원을 소개하겠습니다."

강덕기 이장님이 심사위원장이시고 재경향우회장, 4H클럽회장, 청년회장이 심사위원이었다. 참가자 중 어떻게든 연줄이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열일곱 열아홉 처녀 총각들이 병풍을 치듯 한 군데 몰려서 있다.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차림 누나들은 마산에선 공순이였고 서울에선 식모, 버스 차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향에서만큼은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공돌이도 이날만은 가장 멋진 신사다.

"참가번호 1번, 정용철!"
"안녕하신그라우?"
"정용철 씨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마을 제일 아랫집 셋째 아들로 지금 광주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답니다. 자 박수로 노래를 듣겠습니다."

윤수일의 <아파트>를 불렀다. 아파트가 뭔지는 몰랐지만 신나기만 했다.

"자자. 그럼 이번엔 아가씨를 한분 모셔볼까요? 우리 동네 명카스 이순이씨를 소개합니다."

얼굴은 달덩이같이 예쁘고 차림새도 단정하지만 아직 목청이 제대로 트이지 않았는지 반주와 호흡이 맞지 않았다.

단골로 빠지지 않는 자녀 일곱을 둔 해자엄마가 3번으로 나왔다. 걸쭉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당신만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그 추억이 또다시 온다 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귀가 찢어지도록 고음에다 몸서리치듯 사랑을 토하는 듯했다. 이 한방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으로 짜여진 초반 출연자들도 덩달아 디스코를 추며 흥겨운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어떤 형은 머리에 새끼줄을 묶고 나오기도 했고 누구 흉내를 내는지 몰랐지만 넥타이 풀고 단상에서 마이크 대를 들고도 부른다. 이 분위기였다간 앞으론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만나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패티김 노래로 1, 2부가 끝이 났다.

어서 커서 꼭 1등을 먹고야 말겠다던 다짐은 물거품이 되고...

어린 나는 새 옷에 벌써 꼬깃꼬깃해진 돈을 매만지며 '나도 한번 참가해봐. 아냐 괜히 나갔다가 우세 살 일이 뭐가 있어. 참자 참아'라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됐던 행사가 끝이 났다. '어…어!' 허탈해하며 잠자코 있었다.

채점과 수상자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부터는 주최 측과 어른들이 한데 부둥켜안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내 형도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고까짓 것 사랑 때문에"로 시작하는 나훈아 노래를 잘도 불렀다. 마이크를 바꿔가며 남진, 이미자, 송대관, 최희준씨 노래를 부른다.

이름은 까먹었지만 그날 1등은 <달 타령>을 부른 우데미(마을 위쪽) 사람이었다. 세대가 다른 젊은층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니 썰렁해졌다. 그 사이 악단은 광주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마이크를 돌려달라며 떼를 쓰지만 술에 떡이 된 마을 사람들은 쉬 내놓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70년대는 흘러갔다. 농악 세대 다음으로 잠시 고향 대중문화를 이끌었고 마을 사람들을 한데 묶어줬던 콩쿠르대회는 그 뒤로 열리지 않아 멋들어지게 한곡 뽑아보겠다던 내 다짐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서 커서 1등을 먹고 싶었지만 1981년부턴가 아예 모습을 감췄고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노느라 참가할 생각마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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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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