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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 빠지지 않았던 산적과 부침개 그리고 부깨미(부꾸미). 돼지비계 올리고 호박꽁댕이나 무뿌리로 골고루 묻히며 전을 부치면 명절 쇨 준비 거의 다 되었다.
명절 때 빠지지 않았던 산적과 부침개 그리고 부깨미(부꾸미). 돼지비계 올리고 호박꽁댕이나 무뿌리로 골고루 묻히며 전을 부치면 명절 쇨 준비 거의 다 되었다. ⓒ 김용철

집집마다 절구소리 요란하고 산적과 전을 붙이니 온 동네가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한껏 한가위 전야는 무르익고 있었다.

광주를 오가던 버스는 벌써 웬만큼 들어와 내 맘을 더 간절하게 했다. '방구 깨나 뀐다'는 택시도 광주에서 추석을 새러 세 대나 들어왔다. 우리 형제들도 서울이 아닌 가까운 광주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동구 밖에 나가 하염없이 두 형과 누나를 기다렸다. 쉬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난 서성이고 있을까.

주머니엔 덜 익은 벼를 물에 삶아 쪄 말린 올개쌀(올벼쌀)이 가득 들어있다. 심심풀이로 계속 씹노라면 약간 쌉쌀한 맛이 나면서도 침을 많이 나오게 하니 시간 때우기는 안성맞춤이다.

형들이 혹시나 못 오면 어쩌나 애가 탔다.

"엄마, 언제나 올랑가?"
"글씨다. 하마 옥과장까장은 왔겠제."

"곰방 오겄수?"
"하믄. 째까만 지달리믄 됭께 집에서 기다리그라. 오면 빠쓰가 빵빵거릴 것이여."
"알았당께요."

잠시 뿐이었다. 1년에 두 번하는 목욕도 대충이었고 아버지 닭 잡는 것도 돕지 않고 궁금하여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렸다. 왜 나는 그리 간절히 기다린 걸까? 유난히 나를 예뻐해서일까? 내가 지금껏 살면서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토록 기다림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을까 모르겠다.

동네 친구 두엇이 나와 기다려 심심하지는 않았다. 가로등도 없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회관 앞 국기봉 아래서 우린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숨바꼭질을 하며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지칠 대로 지쳐 잠시 쉬고 있노라니 쏜살같이 뛰어 물 속으로 퐁당 빠지는 게 있다.

"야, 너 독뎅이 떵겄냐?"
"아니."

"근디 쩌거시 뭐시냐? 어-어, 움직인다."
"어디?"

"쥐새끼구만. 들쥐야."
"근디 허벌나게 헤엄을 잘 치네. 벌써 저짝으로 건너가부렀어야."

들쥐는 우리들의 놀이터인 개울가를 건너 건너편 풀숲으로 사라졌다.

열대여섯 시간을 달려 귀향버스 마을 앞에 도착하여 벌어진 풍경

얼마나 기다렸을까, 밤 10시가 되자 불을 밝히며 동네 아래 깨 거북이만큼 느리게 뭔가 기어 올라오다 멈춰 선다. 분명 정지나무 부근이다. 길이 좁아 가까스로 바퀴만 걸쳐 비킨 듯 세 대가 똑같은 자리에 잠시 멈췄다가 올라온다. 그 자리에서 첫차에 탄 향우회 총무와 기사아저씨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게다.

잠시 후 어머니 말씀대로 "빵빵" 소리를 내며 마을 앞을 통과하였다. 돌릴 수나 있을까 모르게 엄청나게 큰 차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에서부터 '북면 양지마을'이라 쓴 귀향버스가 열대여섯 시간을 기듯 달려와 짐과 사람을 줄줄이 뱉어냈다.

두 손을 잡고 놓지 않은 사람 태반이다. "잘 지냈쟈?" "예. 예."를 반복하면서도 아들딸은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꽁무니를 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할머니와 부모님께 손을 맡긴 채 고개를 어디에 둘지를 모른다. 친구들끼리 악수를 하며 날이 새면 다시 보자고 다짐을 하느라 버스가 움직일 틈이 없다. 사람과 짐이 내리느라 1시간을 너끈히 넘기고 만다.

짐이 어찌나 많던지 아직도 사과 짝, 옷 꾸러미, 청주(淸酒)와 운동화를 내리느라 북새통이다. 마중을 나간 식구들 중 한 사람은 짐이 섞이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켜서 있고 그 짐을 나르기 위해 대여섯 명이 두 번을 오간다.

짐을 옮기고 버스가 서울을 향해 떠나고 상황이 마무리되자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다. 유난히 소를 좋아했던 큰 형은 지난 설에 부친 돈으로 샀다는 소가 얼마나 컸는지 외양간을 들여다보느라 밥 먹으라는 소리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재차 삼차 재촉을 하자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왔다. 결국 열두 시가 다 되어 식구대로 모여 앉아 거나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올 추석에도 가장 큰 달이 고향마을에 꼭 뜨기를 바란다. 2005 우리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올 추석에도 가장 큰 달이 고향마을에 꼭 뜨기를 바란다. 2005 우리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 김용철

추석날 아침, 형들 사랑을 독차지하다

일어나자마자 형들과 누나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직 벼를 벨 날이 얼마나 남은 한가한 추석이라 방에서 노는 일이나 큰댁에 인사드리러 가는 게 다였지만 두 형은 번갈아 가며 누워서 나를 두 발바닥에 올리고 손을 놓는다.

"아이쿠! 살살혀 큰성. 아따매 아푼 거."
"됐냐?"
"아니, 글도 째까 더 해야제."

이른바 도구통이다. 절구질을 하듯 좌우 위아래로 흔든다. 창자가 같이 움직이고 간지럼까지 곁들여지며 공중에 들려있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곧이어 나를 성가시듯 데리고 노느라 정신없다.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마음을 쉬고 있는 것이리라. 마무리로 양손을 뻗혀 뒤쪽에서 귀에 대고 천장까지 힘껏 들어올린다.

"아, 아~ 아야~"
"보이냐?"

"아푸다니까. 뭐?"
"서울 보이냐구?"

"응응 보여. 진짜 성아들 사는데 좋구만…."
"진짜로?"
"그려. 참말로!"

귀가 떨어질 듯 아프지만 선망의 대상이었던 형과 함께 노닥거리니 이게 바로 즐거움 아닌가 싶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상을 치우고 있는 사이 밥 먹을 때 먹어보지 못한 부침개를 날름 한 개 주워들었다. 부깨미(부꾸미)다.

둘째 형은 아수라백작인지 프랑켄슈타인 소리를 내며 나를 궁지로 몰았다.

당시 동네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형이 사온 딱지를 주머니에 넣은 채 어깨춤에 발을 쳐올리며 밀양아리랑을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흥얼거리며 폴짝폴짝 뛰어 나갔다.

이른 추석이었지만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아침부터 어른들은 얼굴이 불콰해서 뒷짐을 지고 다니신다.

덧붙이는 글 | 마음이라도 풍성한 명절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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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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