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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농약 통을 앞에두고 당시 농촌지도소에서 교육을 하고 있는 장면.
70년대 후반 농약 통을 앞에두고 당시 농촌지도소에서 교육을 하고 있는 장면. ⓒ 신안군
1982년 산골에도 벼가 누렇게 익어갔다. 어린 나이에 기운 가세를 살려보겠다는 두 형과 누나가 안 쓰고 아껴서 부친 돈과 그들이 사준 소를 팔아 몇 해 전부터 땅 마지기를 넓혀갔다.

집 앞 580평, 학교 뒤 600여 평에 송단 쪽으로 내려가는 길가 논 450평까지 거푸 2~3년 동안 여덟 마지기(마지기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논은 보통 200평)를 샀다. 이웃으로부터 한껏 부러움을 산 우리 집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욕심이었는지 우리 논으로도 모자라 여러 해째 '묵갈림'으로 지어온 땅을 되돌려주지 않고 10마지기 농사를 더 지었다. 당신은 내가 몇 번 여쭐 때마다 "꼭 올해까지만 지을 것이여. 남의 땅은 몸써리(몸서리)가 나서 더는 못 짓는당께"라고 하셨다.

그 해는 셋째 형마저 중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위해 나간 첫해여서 어머니와 아버지 몫에 내 차지가 컸다.

묵갈림은 소작의 일종인데 병작반수(竝作半收)다. 절반은 땅주인에게 논에서 열 다발씩 가려 다발 채 넘겨주거나 탈곡을 하여 가마니로 나눈다. 그만한 착취로도 모자라 깐깐한 지주는 논에까지 저울을 지고 오거나 다발이 큰 걸 고르느라 눈알이 빨간 사람도 있었다.

한 해 기껏 농사지어봤자 우리 차지는 나머지 절반에 반도 안 된다. 경운비용, 품삯, 비료값, 농약대를 제하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수매로 냈다. 게다가 수리조합(농업용 대형 저수지. 매년 말에 수세를 걷었다)이 들어서 물 값까지 더해졌다. 지어봤자 본전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대표적인 해로 우린 냉해로 전국이 앓던 1981년 가을을 기억하곤 한다.

헛농사를 짓기 위해 씨나락(볍씨) 담그고, 모내기에, 김매는 걸로도 모자라 비료를 들이부었고 자연히 농약통을 지고 다니는 헛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게다. 그해따라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셨는지 평소보다 두 배 가량 농사를 지었다.

여름 내내 농약 통을 지고 살았던 어머니와 나

잎을 이렇게 보든가 탈탈 털고 눈으로 확인하여 조금이라도 나타나기 시작하면 농약을 쳐댔습니다.
잎을 이렇게 보든가 탈탈 털고 눈으로 확인하여 조금이라도 나타나기 시작하면 농약을 쳐댔습니다. ⓒ 김규환
마침 2년여 병마를 딛고 중학교 2학년으로 성장한 나는 여름방학 내내 공부와는 담쌓고 논으로 갔다. 제초제를 쓰기 시작한지라 수레바퀴처럼 생긴 농기구를 밀고 다니는 일은 없었지만 그보다 훨씬 고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18리터 한 말짜리 양철 농약통을 지고 살았다. 그 덕인지 지금도 농촌들녘을 지나치다 농약 냄새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코를 가졌다.

어머니와 나는 단짝이었다. 아버지는 농약통만 지면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쓰러진다고 했다. 단짝이 옆집에서 통을 하나 더 빌려오면 논으로 나간다. 아버지께선 평소 손수레도 끌지 않으셨던 약골이었으니 집안에 험한 일은 어머니와 우리들 몫이었다.

이미 산골짜기 논 중에서 그래도 상답인 기름진 논배미는 벼 포기가 꽉 들어차 있다. 키도 어찌나 컸던지 물이 덜 빠진 무논에 맨몸으로 들어가도 발이 푹푹 빠진다. 가까이에서도 서로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도록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 땐 왜 그리 농약을 많이 쳤을까?

식량증산=병충해방제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식량증산=병충해방제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 신안군
집을 나서기 전에 알루미늄 통을 어깨에 메고 큰 플라스틱 바가지엔 물약, 가루약으로 나뉜 살균제, 살충제를 대여섯 가지 챙겨 담는다. 열 가지에 이를 때도 있었다. 행여 잡초약을 썼을지 모르므로 마을 앞에 이르러 빌려온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몇 번을 헹군다.

'달가닥' '달가닥' 소리를 내며 분무기 채를 잡고 들길로 들어선다. 아침에 한 번 해질녘 한 번 왕복 길을 지나야 한다. 이른 아침 이슬이 깨지 않을 때 나서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쳐야 더위를 덜 먹고 쓰러지지 않았다. 대낮엔 꼴을 베거나 낮잠을 늘어지게 자두고 4시가 넘어 다시 논으로 나가 약을 뿌리고 저녁 이슬이 덮일 때 돌아오는 일상이었다.

벌레와 병균은 우리 골짜기로 죄다 몰려들었는지 그 해엔 흰빛잎마름병, 이화명충나방, 혹명나방, 벼멸구, 문고병이 창궐했다. 벼가 커감에 따라 잎도열병이 생겨서 불에 그슬린 듯 주저앉지를 않나 목도열병을 앓아 모가지가 거꾸러뜨리고 이삭이 팬 뒤에도 벼 알에도 도열병이 생겼다.

집집마다 배동이 나와 꽃이 피는 이삼일만 빼고 들녘은 허수아비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식농약 통과 구식분무기를 지고 들판을 누볐다. 신식은 물에 녹는 약을 풀고 시동을 걸어 양쪽 10미터가 넘는 넓은 폭을 두고 휘익 저으며 지나간다.

분제가 나온 뒤론 하얀 분사 천을 긴 방향 논 양쪽 끝에서 하얀 밀가루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툴툴 털어내면 가루약을 잔뜩 쏟아내 벼에 착 달라붙는다. 물 없이 치는 방식이다.

어머니와 나는 분제와 수용제, 수화제를 가리지 않고 물을 한두 바가지 붓고 숟가락과 병뚜껑으로 파단, 네오아소진과 바리톤, 빔, 키타진, 히노산, 후치왕, 다이아지논, 말라티온, 바사, 스미치온 등 집에 있는 농약 있는 걸 모두 통에 섞는다.

중간에 약을 넣었으니 거품이 희푸르다. 뽀글뽀글 거품이 넘쳐 오른다. 옆으로 거품을 털어내고 오른쪽에 붙은 손잡이를 몇 번 움직이면 압축이 단단히 되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이젠 논으로 들어가 왼손에 있는 노즐 호스를 잡고 서너 줄에서 많게는 다섯줄을 잡아 뒤뚱뒤뚱 걸어간다.

온몸이 근질근질했던 '파단'과 갖가지 농약

그 평화롭던 마을에 수리조합이 생기고 농사법이 바뀐 뒤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답니다. 농촌도 피폐해졌답니다.
그 평화롭던 마을에 수리조합이 생기고 농사법이 바뀐 뒤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답니다. 농촌도 피폐해졌답니다. ⓒ 김규환
'피시식' 소리를 내며 농약이 벼 잎사귀에 붙는다. 이슬과 농약이 뒤섞인 뒤쪽을 따라 가니 싸한 냄새가 확 풍긴다. 마스크를 하나마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나왔으니 냄새는 지독했다.

오른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잠시라도 쉬었다가는 골고루 뿌려지지 않으니 한 통이 끝날 때까지 작두질을 연신해대는 것이다. 세게 대여섯 차례 움직이다가 잠시 빡빡하면 쉴 뿐이었다. 하얀 뜨물이 뚝뚝 떨어진다. 장화도 없이 맨발이다.

파단까지 섞었으니 이내 몸이 간지러웠다. 아버지께서 비옷을 입고 나서라는 말씀을 어겼으니 된통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간질간질, 근질근질 참을 수 없다. 도리 없이 한 통을 마쳐야 한다.

그뿐인가? 화본과(禾本科 벼과) 식물 중 하나인 억새만 하더라도 가을엔 스치기만 해도 손을 베이기 일쑤인데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라 무릎과 팔꿈치 아래 노출된 살갗을 사정없이 긁어댄다. 성기게 자란 개털 주위로 풀독이 영 가시지 않았다. 이왕 버린 몸 이 두 배미는 마쳐야 한다.

부옇게 분사되는 꼭지 다섯 개를 뽑아버리고 노즐 없이 연결된 부위를 약간만 열고 손놀림을 빨리하여 쏘다녔다. 어머니는 한 개라도 밟을까, 그러다 내가 넘어질까 걱정이었는지 "살살 다녀라와"하셨다.

아랑곳 않고 뛰듯 폭을 두 배나 넓게 잡고 쏘아댔다. 농약통이 지뚱지뚱 넘어질 기세다. 벼를 밟는 건 예삿일이었다. 한번 지나간 자리는 두 번 다시 밟지 않는 법. 논두렁 위에서 '치지-직~치익' 연발탄을 날리니 다른 날보다 일찍 마쳤다.

목도열병 때문에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게 확실합니다. 100% 화학비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목도열병 때문에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게 확실합니다. 100% 화학비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 김규환
그 뒤로 일찍 마치고 돌아오면 농약 치는 방식을 문제 삼곤 했지만 시간이 절반밖에 걸리지 않으니 가끔 하기 싫어 억지로 할 땐 애용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나는 각자 네 통씩을 2시간 동안 600여 평 세마지기에 뿌리고 오전 일을 마쳤다.

평소엔 신작로 길바닥 돌과 풀이 난걸 모두 보며 천천히 갔지만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집으로 뛰어가 빨랫비누를 갖고 다시 냇가로 뛰었다. 흥건한 옷을 입은 채 물 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갔다. 세 번이나 비누칠을 하고는 점심을 먹곤 했다.

모내기를 하고는 뜬 모를 마치고 김매기 뒤엔 참 할 일이 많다. 우선 시급한 게 논두렁콩 심는 일이다. 그 다음엔 추수를 마칠 때까지 서너 차례에서 대여섯 번 논두렁 풀을 베어야 한다. 그 걸로 일이 끝이 아니었다. 비료를 친 후, 벼가 뿌리를 박아 가무잡잡해지면 사람들은 더 바빠진다. 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다름 아닌 농약을 치는 일인데 장마 전에 한번 치기 시작하여 부지런한 사람은 열흘이 멀다하고 벼가 자라는 동안 많게는 열 번 가량 뿌려댄다. 우린 그해 내가 세 번을 혼자서 도맡았고 두 번은 어머니와 함께 3번은 어머니가 혼자서 마쳤다.

가을이 깊어가도 병해충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집집마다 비상이 걸렸다. 내외가 같이 나오고 인부와 장비를 사서 뿌렸다. 우린 어머니 혼자서도 감당하기 힘든 넓은 땅이었다.

문중 싸움으로 아버지 몸져눕자 상황 악화

그때는 벼가 꽃이 피는 며칠만 빼고 농약을 쳤습니다.
그때는 벼가 꽃이 피는 며칠만 빼고 농약을 쳤습니다. ⓒ 김규환
개학 후 나는 띵가 띵가 한참 첫사랑에 빠져 집안일이라곤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학교 간 아들 몫까지 하시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른 추석이 들어 '올벼심리'도 하지 못했다. 아뿔싸! 어머니를 사지로 내몬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추석 날 아침밥을 먹고 나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대대로 할아버지 앞으로 되어 있던 선산 드넓은 땅을 세금을 내지 못한 할아버지가 몇몇 사람 앞으로 대신 등기를 하였는데 그 자손인 한 사람이 출향 후 아무도 모르게 문중 땅을 팔아 혼자서 삼켜버린 일로 주먹다짐이 오전 내내 있었다.

급기야 형들이 나섰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 허리를 다쳐 그날로 그해가 갈 때까지 몸져 누워 있어야 했던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그걸로 끝났으면 내 운명도 바뀌었을 게다. 불행의 씨앗은 홀씨처럼 번져갔다.

농약을 더 자주 치던 어머니가 어느 날 내게 팔뚝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아야, 니 어매가 아프다."
"왜라우?"
"농약 치다가 나락에 베었어. 근디 이리로 농약이 들어갔나 보다."
"어디라우?"
"여기 왼쪽팔꿈치."
"아따, 글면 농약을 치지 말아야제 왜 계속 했다요?"
"글도 어쩔 수 있간디. 니기 아부진 못 혀잖녀."
"진작 말씀허시지 왜 인자사 그런다요. 참 답답도 허시네."

어머니 팔 관절 부위는 퉁퉁 두 배나 부어 있었다. 상처 난 자리에 복대로 쓰던 천을 친친 감았으니 더 오래 농약이 머물러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 몸으로 전체 논에 농약을 한 번 더 치신 모양이다. 며칠 후 어머니는 하시던 모든 일을 접고 "그냥 다녀오마"고 작은 병원엘 갔다.

다녀오셔서는 "젖 몽우리가 잽혀야"라고 하신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약 드시고 며칠 푹 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유방까지 무슨 병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 만져보니 돌멩이 하나쯤 된 딱딱한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관절이 벼에 베이고 유방으로 번져 끝내 돌아오지 못하신 어머니

이렇게 분말을 뿌리고 나면 벼를 벨 때까지 하얀 가루가 남아 있답니다. 우리 소도 이런 농약 때문에 죽었지요. 다수확을 해야한다는 것 밖에 몰랐으니까요. 통일벼와 유신벼가 흔했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분말을 뿌리고 나면 벼를 벨 때까지 하얀 가루가 남아 있답니다. 우리 소도 이런 농약 때문에 죽었지요. 다수확을 해야한다는 것 밖에 몰랐으니까요. 통일벼와 유신벼가 흔했던 시절입니다. ⓒ 신안군
날로 정지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는 전에 언젠가 했던 말을 툭 내뱉었다. "내가 쉰까지만 살다 죽으면 원이 없겠다." 뭐람? 마음이 약해져서인가? 아니면 진짜 죽는다는 소린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속으로 날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리 엄마가 이제 몇 살인데. 마흔 아홉밖에 안 됐는데 무슨?' 기도하듯 되뇌었다. 좋지 않은 일은 생각만 해도 현실이 되지 않던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어머니는 참고 사는 게 이력이 붙은 사람이다. 그런데 자꾸 아프다고 한다. 큰 병원에 가서 안에 든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몽우리가 별 건가 그냥 빼서 버리면 수술 끝 아닌가라고 순진하게 안 내가 잘못이었다.

어머니는 광주로 갔다가 가망이 없다는 소리에 제사 모시기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교회로 바꾼 이후 주장맥이굿(주장막이: 전라도에서 산살, 상여살, 기살을 맞았을 때 하는 굿)을 하였다. 싸늘한 10월 중순 밤 덕석말이(멍석말이)를 당하였다. 절구공이로 치도곤을 당하는 분위기다. 그제야 정말 어머니가 죽는가보다는 느낌이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돌아가시기 1달을 남기고 부랴부랴 바쁘다던 누나와 형들이 서울서 내려왔다. 광주기독병원으로 실려 간 뒤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에게 면회 한 번만 허용한 채 싸늘하게 식어 집으로 돌아왔다. 음력 내 생일 이틀 전이다.

일과 농약, 못난 집안에 시집온 결과였다. 늦게 배운 재주 밤새는 줄 모른다고 못된 농정과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내가 내린 어머니 병명은 중금속 중독이다. 마셨으면 쉬 알았겠지만 스며드는 통에 어찌 알았겠는가.

어머니는 모질게 살다가 눈을 감고 말았지만 난 지금도 농약 생각하면 진저리, 몸서리가 쳐진다. 울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어머니다. 이태 전에 짚에 남은 농약을 먹고 소가 죽어 펑펑 울었는데 무슨 변고란 말인가. 그해 겨울부터 난 몹시 추웠다. 그렇게 꿀맛 같던 화려한 내 봄날은 갔다.

이젠 농약을 거둘 때입니다. 상생하는 농업은 자연과 작물, 생산자와 소비자  서로 이롭습니다.
이젠 농약을 거둘 때입니다. 상생하는 농업은 자연과 작물, 생산자와 소비자 서로 이롭습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농약은 이제 그만 치고 싶습니다. 우리 농업도 바뀌길 바랍니다. 소비자가 먼저 나서면 농사도 많이 바뀔 겁니다. 요즘엔 하얀 가루약으로 부침개를 부쳐서 드시는 할머니들 보면 차라리 그 때 돌아가시길 잘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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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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