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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하다가 귀국한 사람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위해 베트남 공항에 도착한 순간 낯익은 세 명의 베트남인들이 손에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5월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의 신고로 강제 추방되었던 타오와 킴, 남편의 산재에 대한 유족보상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왔다 간 꾹(관련기사 5월27일)이었다.

▲ 공항에 마중나온 이들과
ⓒ 고기복
강제추방을 앞두고 눈물 범벅이었던 두 사람과 근 보름만에 만난 꾹의 얼굴은 한국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여유 있고 안정돼 보였다.

택시를 타고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나는 헤어진 지 보름밖에 되지 않던 꾹의 근황이 가장 궁금하여, 어떻게 지내는지를 킴을 통해 물어 보았다. 꾹은 시댁 식구들이 보상금 받은 것을 내놓으라고 계속 조르고 있는데, 아이들을 위해 일부 현금만 남겨놓고 땅을 매입했다고 전해줬다.

그리고 조용히 웃으며 답하던 꾹이 가만히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 알고 있어요.”
“뭘요?”
“남편이 다른 여자랑 살았던 거요”

그 말을 옆에서 듣던 킴이 “그 여자, 한국 사람하고 결혼하고 도망간 여자, 그 여자가 다 말해버렸어요”라고 말을 거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꾹이 입국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무슨 일이냐고 물은 나에게 꾹은 “아이들 생각에 울었다”고 간단하게 답했었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김탄은 무척 난처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 말았었다.

그때 김탄은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려다 말았던 것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아 두 명을 꾹과 함께 자게 했는데, 그중 한명이 남편과 동거했던 여자를 욕하면서 남편의 생전 얘기를 하자, 꾹은 서러움에 밤새 울었었다고 말했다.

마중 나온 친구들의 도움으로 숙소에 도착하여 잠시 여장을 푸는 사이, 꾹의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꾹의 외삼촌은 꾹의 남편이 한국에서 죽고 난 후, 줄곧 아이들 뒷바라지를 도와주셨던 분이었다. 평생 의지하고 싶었을 친지를 잃은 꾹의 슬픔에 달리 위로할 방도가 없었다.

닷새 뒤 꾹의 초청으로 꾹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꾹의 살고 있는 지역은 하노이에서 두 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하이쭝이라는 지역이었는데, 한참 건축 붐이 일고 있어서 도시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꾹도 그러한 건설 현장에서 매일 일했었다고 했다.

포장이 되지 않은 골목 안에 위치한 꾹의 집은 비좁고 누추했고, 세면장에 세수 비누 하나 없이 단촐한 살림살이였다. 그런 가운데도 집안에 가장 번듯하게 차려진 것은 죽은 남편의 영정사진이었다. 향이 피워져 있는 영정을 보며, 꾹에게 “알거 다 안다면서 남편 사진 걸어놓고 싶더냐?”고 짐짓 물어보았다.

▲ 꾹의 남편 영정
ⓒ 고기복
그 말에 꾹은 살짝 웃더니, 정색을 하고 이렇게 답했다. “작은 애는 아빠 얼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한국에서 죽은 것만 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리고 여긴 작은 동네라 제가 영정을 치운다면, 남편 잡아먹고 변심했다고 할 거예요. 전 아이들이 아빠 때문에 욕먹으며 자라길 원치 않아요. 남편이 죽었지만, 아이들에겐 듬직한 아빠로 남길 바래요. 저는 아이들을 보며 살 사람이니까요.”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정 앞에서 나는 “꾹이 한국에 왔을 때, 남편 생전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나는 그게 두 분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한국에서 남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역시 꾹은 살짝 웃더니, “한국에 오면서 남편이 생전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날 밤, 밤새 울었던 것은 남편 잃은 처지에, 새파랗게 젊은 사람으로부터 남편의 생전 얘기를 들으며 떠오르는 상념들 때문이었어요. 이런 소문이 베트남에까지 들리면 아이들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꾹에게 한국에서처럼 철없는 여자가 나타나서 소문을 내면 어떡할 거냐고 다시 물었다. “예전엔 제가 너무 세상을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이젠 아이들의 아빠에 대해 누군가 수군거리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애들 아빠가 애들을 키운다고요.”

그리고 꾹은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김탄이나 여러 사람들이 쉬쉬하며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를 알아요. 그 배려가 고마웠고, 당신의 침묵이 고마웠어요.”

보름 사이에 더 강해진 모정 앞에서 목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꾹의 식사 초대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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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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