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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보리밭, 돌담, 바다를 볼 수 있어 좋다
걸으면 보리밭, 돌담, 바다를 볼 수 있어 좋다 ⓒ 김준

항공에서 찍은 우도 모습(우도박물관에 걸린 사진)
항공에서 찍은 우도 모습(우도박물관에 걸린 사진) ⓒ 김준
우도는 소가 머리를 들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쉐셤', '쉐섬' 으로 표기하다 우도(牛島)로 정착하였다. 제주말로 '쉐'는 소를 뜻한다. 따라서 '쉐섬'이란 '소가 누어있는 형상'을 이르는 이름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우도가 국영목장으로 '쉐목장'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한 모양새로 지명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도는 성산반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수면상승과 지각변동에 따라 생긴 수중화산도이다. 성산포와 우도는 연결되어 있다. 우도의 탄생과 관련된 설문대할망의 전설에서도 성산과 우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하루는 설문대할망이 한쪽 다리는 식산봉에 다른 한쪽은 일출봉에 걸치고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발에 우도가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산포에서 우도까지는 10분밖에 안 걸리지만 조류가 아주 세다고 한다.

그런데 우도의 '쉐머리오름'에서는 바다 속에서 용암이 분출하면서 형성된 해양성 식물군락인 갈대의 식물화석과 갯벌성 조간대에 사는 갑각류의 생물화석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재 우도에는 갈대군락이 없으나 인근 성산포 내만지역에는 갈대군락이 형성돼 있어 설화를 입증(?)하고 있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홍적세 초반만 해도 한반도, 중국, 일본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홍적세에 4번의 빙하기가 있었는데 제 4빙하기에 이들이 서로 분리되었고, 제주와 한반도의 분리는 대략 12,000-10,000년 전으로 마지막 빙하기인 홍적세에서 충적세로 전환되는 시기라고 한다.

해녀들이 무사함과 외부(뭍)로부터 오는 액운을 막는 방사탑, 마을입구나 포구 등에 쌓았다
해녀들이 무사함과 외부(뭍)로부터 오는 액운을 막는 방사탑, 마을입구나 포구 등에 쌓았다 ⓒ 김준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우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물론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쉐머리 오름' 서남쪽 방향에는 한 기의 고인돌이 길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어 제주에 정착한 조상들과 같은 시기라고 생각할 뿐이다. 제주도의 고인돌은 한반도에 고인돌이 등장한 시기와 사뭇 다르다.

변방의 시선으로 중앙의 역사 전복을 꿈꾸는 이영권 선생님은 한반도에 권력자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10세기 청동기문화로부터라고 하지만 제주도에 청동기문화가 유입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제주에서 변변한 청동기 문화를 찾기도 어려우며, 고인돌 문화 역시 청동기 후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약 제주의 아이들이 고인돌은 어느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종달리에서 우도에 입도한 사람들이 처음 들어온 곳이라 붙여진 '드렁코지'
종달리에서 우도에 입도한 사람들이 처음 들어온 곳이라 붙여진 '드렁코지' ⓒ 김준
우도가 중앙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679년이다. 중앙에서 제주도에 관심을 가졌던 가장 큰 이유는 '군마'를 기르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중 우도몰(말)을 으뜸으로 쳐주었다. 자연적인 조건이 말 기르기에 적합하여 원나라가 제주도를 지배하던 고려말에는 우도를 국영목장으로 이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우도에 대한 언급은 숙종 23년 1679년 유한명 제주목사 시절 말 150필을 방목하면서 국영목장지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헌종 10년 1844년 김석린 진사 일행이 입도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에 일부 해산물채취자들이 출입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는 기록에 의해서 살펴본 것일 뿐 제주백성들은 일찍부터 쉐섬을 무시로 출입하며 고기를 잡고 미역을 뜯고, 전복을 땄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누구로부터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도 물산이 풍부한 우도와 같은 섬으로 들어온 백성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성산에서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오지만 우도에 최초로 입도한 사람들은 구좌읍 종달리 만세코지에서 테우를 타고 들어왔다고 전한다. 당시 입도조들이 들어왔던 포구를 우도 사람들은 '들어온 코지'라고 해서 '드렁코지'라고 부른다. <시월애>를 촬영한 홍조단괴해빈해수욕장에서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면 왼쪽에 '코지'가 있고 그 옆에 현대식 포구가 있다. 그 작은 코지가 드렁코지인데,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과 마주하고 있다.

물질을 나가는 우도 잠녀
물질을 나가는 우도 잠녀 ⓒ 김준

물질하는 우도 잠녀의 모습
물질하는 우도 잠녀의 모습 ⓒ 김준
어장질보다 물질이다.

우도는 섬이지만 고기잡이배들이 많지 않다. 섬 내 호수는 680세대에 이르지만 동력선은 50여 척에 불과하다. 이는 잠녀수입이 좋아 어장질보다는 물질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도 인근 바다에는 추자도, 성산포 배들이 모여서 갈치, 고등어 등을 잡고 있다. 이런 선박들을 마련하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운영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주민들은 투자하기 어렵다.

쉐섬의 톨(톳)과 우미(우뭇가사리)가 유명하다. 톳은 육지바다와 달리 3월이면 채취를 시작하고, 우미는 5-6월에 작업을 한다. 물론 소라, 전복 등을 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질은 바람 등으로 1달에 10여 일을 제하고는 매일 하루에 2시간여 작업을 하고 있다.

이렇게 물질을 한 잠녀들의 수입은 일년에 1000-2000여만 원에 이른다. 생각해보라 60대 할망의 수입이 1,000만원이 넘어가고 상군은 2,000여만 원에 이른다면 이게 적은 수입인가. 잠녀는 상군, 중군, 하군, 똥군으로 물질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다.

잠녀들의 물질은 해산물 이름에다 '물=무레'를 붙여서 작업형태를 구분한다. 예를 들어, 소라, 전복을 캐는 '헛물'과, 미역을 캐는 '메역물=메역무레', 우뭇가사리를 캐는 '우미물=우미무레'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소라, 전복'을 캐는 일은 '헛물'이라고 하는가. 일찍부터 '해녀연구'를 해온 김영돈(한국해녀의 이해)은 우뭇가사리나 톳 따위의 해조류는 일정한 채취기간을 두고 때맞추어 캐므로, 물질을 치르게 되면 많든 적든 해산물을 얼마간 캘 수 있다는 보장이 서지만, 전복·소라 캐기는 재수가 좋으면 꽤 캘 수 있고, 어떤 때에는 빈손으로 나올 수도 있어 그리 이른다고 적고 있다.

30 여명의 잠녀들이 우도 서광리 앞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
30 여명의 잠녀들이 우도 서광리 앞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 ⓒ 김준
5월에 찾은 우도 곳곳에서 톳, 우뭇가사리를 말리고 있었다. 천진리 앞 바다에는 50여 명의 잠녀들이 우뭇가사리를 뜯고 있었고, 서광리 바다에는 30여 명의 잠녀들이 '헛물'을 하고 있었다. 미역을 딸 때, 우미작업을 할 때, 소라와 전복을 딸 때의 망사리 크기와 그물코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

쉐섬에 잠녀들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74년으로 896명에 이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도의 잠녀들은 소섬에만 머물지 않고 충남, 부산 일대, 구룡포, 욕지도, 전남의 보길도는 물론 멀리 황해도, 해외로는 중국, 러시아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우도의 잠녀들이 출가한 시기는 1890년대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도의 잠녀들이 출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해산물 수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쉐섬에 물질을 하는 잠녀들은 580여 명 정도다. 잠녀들은 조합원과 비조합원으로 구분하는데 , 과거에는 딸자식이 많으면 부자라고 했지만, 지금은 자식들에게 물질을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우도는 농사 반 잠녀들이 채포하는 해산물 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섬이다.

소라, 전복, 문어, 우무가사리 등 잠녀들이 채포하는 해산물로 살아가는 섬이다. 농사도 하지만 큰 소득원은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뭇가사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에서도 우도산이 최고 품질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우뭇가사리를 둘러싼 해녀조합의 횡포는 일제강점기 해녀항일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성산포에 차를 두고

성산포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는 '쉐섬' 우도는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섬이다. 제주도에는 8개의 유인도와 55개의 무인도가 딸려있다. 2004년 기준으로 유인도는 북제주군에 비양도(63호), 우도(743호), 상추자도(951호), 하추자도(443호), 횡간도(18호), 추포도(3호)가 있으며, 남제주군에는 가파도(136호), 마라도(49호) 등이 있다.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도는 중앙동을 중심으로 해안선을 따라 11개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18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우도는 제주도 북제주군에 속하며 1986년 4월 섬이 하나의 면으로 승격되었다.

북제주군에서는 수려한 자연과 해양자원 그리고 청정해역을 보전하고 해양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2001년 1월 1일 우도해상 일대와 우도항과 하목동항 주변을 해상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북제주군은 우도 외에 비양도와 추자도도 해상군립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우도의 톳간니, 왜 톳간니라 했을까.
우도의 톳간니, 왜 톳간니라 했을까. ⓒ 김준

홍조단괴 해빈 해수욕장
홍조단괴 해빈 해수욕장 ⓒ 김준
우도를 찾는 사람들의 관광행태는 체류형이 아니라 시간형이다. 제주시(공항)에서 관광도로로 달려와 성산포를 잠깐 거쳐서 우도에 들어와 해수욕장, 쉐머리오름 등 길면 1-2 시간 머무르다 다시 뭍으로 나간다. 이런 탓에 최근 급격하게 콘도 등 숙박시설이 들어섰지만 모두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관광객의 여행행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우도에는 2004년의 경우 1만여 대의 차량이 들어왔다. 동서로 2.5km, 남북으로 3.8km, 면적이 2백여만 평 정도인 우도에 1만여 차량은 많은 셈이다. 우도는 현재 470여 대의 차량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중 우도만을 운행하는 노선버스와 관광버스 17대가 운행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 평균 150여 대의 차량이 관광객과 함께 들어오고 있다.

차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도로가 새로 만들어져 아름답던 해안이 무너지는가 하면 오염의 위협을 받고 있다. 북제주군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좁은 도로와 환경오염을 이유로 앞으로 '걷기', '자전거' 등으로 우도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우도박물관의 김철식 사무국장은 우도를 관광지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도항선을 행정선으로 전환하고, 자전거 여행, 우도다운 주거형태, 취락개선 등과 같은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도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4-5시간,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3시간이면 족할 것이다. 섬의 자연, 섬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보고 싶거든 성산포에 차를 두고 가길 권한다. 그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섬이야기 5]제주 가파도, [섬이야기 6]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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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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