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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복
지난해 이맘때쯤 산재사고로 사망한 베트남인을 화장하고 벽제화장터를 갔다 오는 길에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난 22일 나는 당시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의 아내 '부흥꾹'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꾹의 얼굴은 어두웠고 무척 불안해 보였다. 그는 몇 번 같이 식사를 한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아주 의례적인 "감사합니다"하는 정도였다.

꾹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베트남에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나서라고 한다. 꾹은 베트남을 떠나오면서부터 아이들 걱정뿐이라고 한다.

꾹은 남편이 한국에서 일을 하다 산재로 목숨을 잃고 한 줌 재가 되어 베트남으로 돌아오던 날 시부모로부터 "우리는 너를 거둘 형편이 못 된다. 네가 아들을 낳은 것도 아니고, 딸만 둘을 낳았는데….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혼자 살아라"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죽음 너머
산재사망 이주노동자를 보내며...

벽제 화장터를 거쳐

숨가쁘게 뛰었던 길 돌아서는 길

깊숙이 집어넣은 손

무거워진 발걸음

퀭한 가슴

크게 가로젓는 머리,

세상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엔 간단치가 않아

돌아선다고

돌아보지 않으리란 건 슬픈 거짓말

자책하지 마라

그저 사람이 죽어난다고

너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항아리에 마감된 인생아!

단정하지 마라

너를 그저 보낸다고

돌아선 길 확실히 아는 건

우리의 이별이 길지 않아

너와 나의 슬픔, 항아리에 봉할 수 있으니

저 세상은 그저 너머일 뿐이라고 끄덕이자
/ 고기복
당시 시부모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꾹은 너무 서러워 통곡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이 강한 베트남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시부모의 말을 '네 인생 네가 책임지라'는 것으로 알고 그 후로 혼자 벌어 아이들을 양육해 왔다고 한다.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여자로선 힘든 건설현장에서 벽돌 나르는 일을 하루도 거루지 않았고, 저녁에는 구멍가게를 열어 하루벌이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 벽돌 나르기로 2달러, 구멍가게에서 1달러로 하루 3달러 정도 되는데, 집값과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도 빠듯하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현재 아이들이 14살, 9살인데 그동안 힘든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큰 탈 없이 잘 자라줬다는 것이다.

그런 꾹이 한국에 오던 날 아이들은 혹시 엄마가 아빠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엄청 울었다고 한다. 우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왔던 터라, 꾹은 그렇게 불안해 했던 것이었다.

꾹은 남편이 산재로 사망한 뒤 그동안 주한베트남 대사관에 산재처리를 요청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외국인 쉼터로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와 관련 근로복지공단 담당자는 "베트남 대사관측에 유족보상과 관련하여 세 번이나 공문을 넣고 전화통화를 했는데, 일이 진전되지 않아 이상했다"며 빠른 처리를 약속했다.

꾹에 의하면 대사관과 베트남연수생 관리회사에선 행정처리를 위한 비용만 요구하고선 1년 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3년 반 동안 일했던 땅을 방문한 꾹의 향후 일정이 순조롭기를 희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 부흥꾹은 현재 근로복지공단에 유족보상을 청구한 상태입니다. 꾹의 남편의 유해송환은 송환비용문제로 사망한 지 두 달이 넘어서야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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