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용인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김혜진씨가 '낙안민속마을의 사계'가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낙안출신 가야금병창의 명인 오태석에 관한 자료를 보내줬다.

용인대 예술대학원 국악학과 가야금병창 전공자인 정명희씨가 1999년에 쓴 '오태석의 가야금병창 활동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논문. 정씨의 논문은 뜻있는 지역민들에게 오태석에 관해 다시금 일깨워주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1930년대에 가야금병창으로 유명했던 오태석씨를 아십니까?

▲ 가야금 병창의 명인 오태석.
ⓒ <낙안읍성>(송갑득 저)
논문을 근거로 지역민들에게 몇 차례 질문을 시도했다. 하지만 너무나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모른다는 대답이 훨씬 많았기 때문. 의아하고 신기하기까지 한 그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예술인이며 바로 이 고장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음악인 오태석.

오태석은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398번지에서 무속인이며 예술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박덕기와 송만갑으로부터 가야금 산조와 판소리를 각각 전수받고 당시 가야금 산조의 곁가지로 인식되던 가야금 병창을 하나의 독립된 음악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민족의 암울한 시대에 국민을 웃고 울렸던 천부적인 배우로, 방송출연을 도맡아 할 정도로 대중적 명성을 날렸으며 중국, 일본 등 해외공연도 많이 했던 국제적 소리꾼 오태석.

가야금 병창으로 중요무형문화재 22호인 박귀희 등을 가르치고 낙안면 동내리의 마을회관 준공식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려와 축하공연을 마치고 일본 공연을 위해 가던 중 부산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낙안 땅의 걸출한 예술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년이 넘었다.

▲ 오태석을 기억하고 있는 낙안에 사는 김영돈씨, 50여년전 벌교 가설극장에서 그가 공연하던 모습들을 회고하고 있다.
ⓒ 서정일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낙안 땅에 살고 있는 김영돈(80)씨는 50여 년 전 벌교 가설극장에서 공연하던 오태석을 떠올린다. 특히 심청전을 보면서는 울다가 웃다가를 거듭했다면서 오태석은 한쪽 눈으로는 울고, 한쪽 눈으로는 웃는 천부적인 사람이라 칭찬한다.

그는 오태석씨 생가를 복원하여 그의 유품이나 자료를 진열하고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견이 예전부터 있긴 있었다면서 책 한 권을 내민다.

<낙안읍성>(송갑득 저). 낙안과 낙안읍성에 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집대성해서 만들어 놓은 책이다. 한 민간인이 엮었다고 보기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 저자 송갑득씨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무인들을 천하게 여기던 관습 때문에 그는 무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로지 노래와 가야금 등 무대에서 생활하였지만 때로는 세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면서 한 많은 세월을 광대로서 외로운 일생을 마감하였으며 지금은 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오태석의 생가.
ⓒ 서정일
무속인이었다는 것으로 천대받고 예술인을 광대라 표현하며 괄시하던 시절에 꿋꿋하게 우리의 가락과 소리를 지킨 오태석이 태어난 동내리 398번지. 지금 그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살고 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 몇몇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를 재평가하고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오태석 생가 복원 및 기념 창극대회를 개최하고자 의견들을 모으고 있는데 의미 있어 보인다. 낙안읍성에 그의 소리를 이어받아 우리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오태석은 낙안면민의 가슴속에서 다시 깨어나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시찾게 하자 낙안읍성
http://www.nagan.or.kr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