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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고 외웠던 선사시대 생활방식이 수렵·채집·어로활동이다. 그때는 그저 교과서에 있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했다. 얼마 전 전라도 구석구석을 물론 늘 엉뚱한 곳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상상을 하는 사람들과 해남을 찾았다. 그곳 마늘밭에서 서남해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굴, 꼬막 등 여러 종의 패류를 볼 수 있었다.

▲ 군곡리 패총 지역은 주민들이 마늘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 김준
2∼3세기의 유물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형체가 잘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도대체 지금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교과서에서 배울 때부터 다를 것이라고 결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꾸꿈스럽게 들여다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 먹고 보는 굴, 꼬막의 껍질과 그곳에서 본 것들은 내가 보기에는 똑같았다. 그곳을 다녀온 후 주섬주섬 발굴보고서를 찾기 시작했고, 패총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패총에서 당시 인간들의 어로생활과 바다생활을 확인할 수 있는 어로도구와 어골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 서남해안 및 동북지방의 해안과 도서지역에서 발견되는 조개더미는 당시 사람들이 먹거나 사용하고 버린 쓰레기더미이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에서 발견되는 자연유물과 인공유물들을 통해서 당시 수렵(사냥법), 어로활동(고기잡이), 채집활동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유물로는 사람뼈, 개나 사슴 등 동물의 뼈와 뿔, 어골류, 쌀보리 등 곡물류 등이 여기에 속한다. 고고학자들은 일찍이 이러한 자연유물보다는 주거지, 분묘, 가마터, 토기, 석기, 철기, 청동기 등 인공유물에 관심을 가졌었다. 자연유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다.

고대인의 타임캡술 패총

화순과 고창, 그리고 강화도 지역에서 집중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 그리고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옹관묘 등이 당시 지배세력들의 흔적이라면 패총은 시기는 달라 동등한 비교는 어렵지만 민초들의 삶의 퇴적이라 할 수 있다.

패총은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신석기시대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고, 철기시대에는 서해안과 남해안 일부지역에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철기시대 패총들은 바다와 떨어진 구릉지대나 고지대에서 나타나고 있다.

원시·고대 어로문화를 연구한 김건수 교수(목포대)가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 160여개의 패총 중에서 전남 41개, 경남 52개가 분포될 정도로 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신석기와 철기시대에 형성된 것들이다.

지금도 어촌마을 인근에는 소라, 석화, 바지락, 백합, 꼬막 껍질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먹고 난 껍질들은 요즘에야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지만 선사시대 조상들이 버린 것들은 오늘날 문자로 확인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역사복원의 자료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에 부산대학팀이 발굴한 동삼동패총에서는 BC 3360년대의 조와 기장의 씨앗을 비롯한 식물들의 유체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 어로, 채집활동만을 했다는 기존의 연구와 신석기 중기에 일부 지역에서 밭농사를 중심으로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증거로 평가되고 있다.

▲ 패류가 산재 해 있는 마늘밭
ⓒ 김준

▲ 현장에서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만 모아 보았다(유물은 개인적으로 가져갈 수 없다)
ⓒ 김준
해남 군곡리 패총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철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1983년 발견되어 1986년 이후 세 차례 발굴조사되어 조개더미, 가마터, 집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조개더미는 길이 300m, 너비 200m로 지금까지 발견된 서남해안 패총 중에서 최대 규모이며, 특이한 것은 중국 신나라의 화폐가 발견되어 형성시기가 주목된다. 비슷한 시기의 경남 삼천포 늑도패총, 경남 김해패총, 마산 성산패총, 제주곽지패총과 비교된다. 백포만이 두모패총과 함께 해남 고대문화를 푸는 열쇠가 된다.'

군곡리 패총은 참굴, 꼬막, 바지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김건수 교수는 군곡리의 꼬막의 크기를 계측해 당시 꼬막이 선택적으로 채취되어 자원의 보호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즘에도 바지락이나 꼬막은 서남해 해역 어민의 대표적인 소득원으로 채취 시기와 채취량은 마을공동체의 엄격한 제한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철기시대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군곡리의 패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군곡리 패총 발굴에 참여한 최성락 교수는 청동기 후기 이후 철기 제조기술의 유입과 해로기술이 이전에 비해서 발달하면서 해안지역에 인구가 증가되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무렵 기후의 한랭화로 식량자원이 부족해졌으며, 인구가 집중되면서 바다로부터 다양한 식량자원을 획득해야 했다. 이와 함께 집단간 갈등이 나타나면서 주거지가 방어적인 요충지로 높아지면서 패총이 바닷가에서 고지대나 구릉지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 패총에서 발견된 숭어, 농어, 참돔 등 어류의 뼈(발굴보고서 사진 재 촬영)
ⓒ 김준

▲ 패총에서 발견되었던 꼬막, 전복, 굴 껍질들(발굴보고서 사진 재 촬영)
ⓒ 김준
바닷가 고대인은 뭘 먹고 살았을까

출토된 유물로 보면 굴, 꼬막, 바지락, 동죽, 가무락조개, 가리맛조개, 홍합, 피조개, 새조개, 비단가리비, 대합 등 이매패류(조개류)와 큰구술우렁이, 소라, 비틀이고동, 갯우렁이, 각시고동, 대수리, 전복, 배말, 피뿔고동, 보말고동, 어깨뿔고동 등 복족류 등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이런 바닷생물만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사슴, 돼지, 토끼의 뼈도 발견되었으며, 볍씨자국도 확인되었다. 군곡리 패총이 형성되었던 시기에는 이미 농사가 행해졌으며 철기의 보급으로 기술도 발달했다. 또 해로 개발이 이루어져 근해어업도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곡리의 발굴에 참여한 渡邊誠 일본 나고야대학 교수는 동물유체를 분석해 어류로는 숭어, 농어, 물렁돔, 참돔, 황새돔, 고등어 등을 확인했었다. 동물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사슴이며 다음은 맷돼지로 확인되었다. 그 외 소와 개의 뼈도 발견되었다.

한편 복골(卜骨)에 쓰이는 뼈도 사슴과 멧돼지 뼈의 비율이 높았다. 사슴과 멧돼지는 야생동물로 사냥을 했으며, 개와 소는 가축동물로 고기를 제공했으며, 개는 사냥개로 소는 농사에 이용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 사슴뼈를 이용해 점을 쳤던 복골(발굴보고서 사진 재 촬영)
ⓒ 김준
복골은 동물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군곡리 패총에서 사슴과 돼지의 어깨뼈를 이용한 복골이 발견되었다. 복골은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사슴과 돼지뼈 등을 불로 지져 만든 것이다. 군곡리의 복골은 김해의 부원동 패총의 것과 같으며 일본의 쓰시마(對馬島), 미끼(壹岐)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에는 어떻게 바다에서 식량을 얻었을까?

원시·고대에는 어떤 어구를 이용해 고기를 잡았을까?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은 그물바늘(編網具), 낚시바늘(鐵約), 어망추, 자돌구(刺突具) 등이다. 동물뼈를 이용해 한쪽은 날카롭고 다른 한쪽은 구멍을 낸 바늘은 그물을 만드는 도구로 그물을 이용해 바다나 산에서 동물들을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군곡리 패총에서는 굴과 다양한 조개류만이 아니라 숭어와 돔, 사슴,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들이 뼈들이 확인되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군곡리에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원시·고대 어구 중에 어망이 존재하였는지는 많은 논란거리이다. 물론 어망이 발굴되면 그 진위는 바로 확인될 수 있지만 산성이 강한 우리 토양에서 나무줄기나 뿌리 등 유기물로 제작된 어망이나 부자(浮子)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리 없다. 다만 바닥에 가라앉는 침자(沈子)와 운이 좋다면 그물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침자는 어망추로 돌, 흙, 토기편 등으로 만들었는데 가장 널리 확산되어 사용했던 것이 점토를 어망의 굵기에 맞는 줄기에 적당한 크기로 쥐어 놓고 응달에 말려 구워서 사용하는 관상토추(管狀土錘)라는 것이었다.

▲ 군곡리 패총에서 발견된 낚시(발굴보고서 사진 재촬영)
ⓒ 김준

▲ 그물을 가라앉도록 발줄에 묶는 발돌(어망추)(발굴보고서 사진 재 촬영)
ⓒ 김준
군곡리에서 확인된 어망추는 관상형(管狀形)과 타원판 부정형 등이 발견되었다. 어망추는 구멍이 뚫려 있어 그물에 달아매어 그물을 가라앉게 하는 오늘날 발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이 걸어구류(각망류)의 그물에도 부자에 해당하는 뜸과 뜸줄이 있고, 침자에 해당하는 발줄과 발돌이 있다.

그물류와 다르게 당시의 고기잡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어구가 낚시바늘이다. 낚시는 결합낚시와 단식낚시로 구분한다. 결합낚시는 축과 침으로 나누어져 축 부분은 실을 맬 수 있는 홈이 파져 있고, 침은 녹각과 멧돼지 등의 어깨뼈로 만들어 결합하였다.

단식낚시는 결합낚시보다 발달한 형태로 오늘날 낚시 바늘과 유사한 모양이며, 걸린 고기가 빠지지 않도록 처리한 미늘(낚시바늘 끝에 가시처럼 역방향으로 삐친 형태)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된다. 군곡리에서 발견된 것은 철제로 만든 단식낚시로 초대형낚시로 분류된다.

한편 자돌구는 물개, 바다표범, 돌고래 등을 잡는 데 사용한 작살과 숭어, 농어 등을 잡는 데 이용한 찌르개가 있다. 군곡리 패총에서 숭어, 농어, 참돔 등의 어체와 찌르개 등이 발견되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군곡리 패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장 많이 발견되는 굴껍질과 전복 등이다. 조간대에 서식하는 다른 갯벌생물과 달리 이들은 고안된 어구를 가지고 채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굴은 '조새'를, 전복은 '빗창'을 이용해 채취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어망추, 낚시와 함께 빗창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오래된 어구인 것이다.

그동안 패총은 고고학 연구자들에게는 '쓰레기더미'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이야기이다. 조개패총은 분명 당시 바다와 갯벌 인근에 거주지를 마련한 사람들이 먹고 사용하고 버린 것들이 모아져 만들어졌다.

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그곳은 당시 일상인들의 생활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 되는 것이다. 고대의 지배세력의 흔적들은 온갖 치장을 하며 포장되고 있다. 반면에 패총은 지금도 그곳 주민들이 마늘이나 고구마를 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현지답사와 관련 문헌을 검토하여 작성하였다. 

‘군곡리 패총’은 해남읍에서 완도가는 국도를 따라 20km를 가다 갈림길에서 송지면으로 들어서 남쪽으로 4.5km가면 군곡이 신정마을이 있고 여기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방처마을가는 농로길을 따라 가다 보면 패총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말매등’이라고 부른다. 군곡리 패총은 전라남도와 해남군의 지원으로 1986년 이후 3차례에 걸쳐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참고자료
김건수(1990), 한국원시·고대 어로문화, 학연문화사
최성락외(2002), 철기시대 패총의 형성배경, 호남고고학보 15집
목포대학교박물관(1987), 해남군 군곡리 패총1, 목포대학교 박물관 학술총서 8
목포대학교박물관(1988), 해남군 군곡리 패총2, 목포대학교 박물관 학술총서 11
목포대학교박물관(1989), 해남군 군곡리 패총3, 목포대학교 박물관 학술총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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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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