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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끊는다"는 말처럼 흔한 말이 없다

3·1절 다음날인 3월 2일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념일이다. 그날은 일요일이 아닌 한 대부분 학교의 새학기 개학 날이다. 나는 2002년 3월 2일, 지난 37년 동안이나 피워 오던 담배를 뚝 끊었다. 그로부터 꼭 만 3년이 지났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담배를 끊었다”라는 말처럼 자주 하는 말도 없을 거다. 하지만 '담배를 끊겠다'는 말은 쉬워도 그 말을 실천하기는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담배 끊은 사람과는 상종치 말라”는 말이다.

▲ 필자가 27년을 근무한 이대부고, 지금은 이대부중 전용이다
ⓒ 박도
어떤 분은 독한 결심을 하고 꼭 실천하고자 공개석상에서 담배를 끊는다고 선언하고는 가지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담배를 피우다가 목격자들에게 몹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사실 그분만 아니라 나도 내가 뱉은 말을 여러 번 가족들과 언저리 사람들에게 식언했다. 그런데 담배란 마약과 같아서 끊기도 힘들지만, 끊었다가 다시 피우면 흡연량이 부쩍 더 늘어난다. 아마도 그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니코틴의 양을 내 몸이 보충하려고 그런가 보다.

내가 정식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대학 입학식 날로 학교에 가면서 아주 당당하게 담배 한갑을 사서 주머니에 넣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 한두 번 친구들이 권해서 담배를 빨아본 적은 있지만, 고등학생 신분으로 피워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짓눌렀던 탓인지 습관적으로 피우지는 않았다.

그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제 성년이 된다는 어떤 우쭐함, 그리고 사교상 꼭 필요한 기호품쯤으로 담배를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지금처럼 금연 캠페인도 요란치 않았다. 남자가 성년이 되면 그 상징으로 담배를 으레 피우는 줄 알고서 콜록거리면서 배웠다.

“담배 일발 장진!”

그러다가 완전히 골초가 된 것은 학훈단 야영 기간과 광주 보병학교 시절을 거치면서다. 고된 피교육자 생활 중 “10분간 휴식!”은 으레 담배를 피우면서 보냈다.

교관들 가운데는 인심이라도 쓰는 양, “담배 일발 장진!”하고서 교육생들이 담배를 물게 하고 이어 “점화!”라고 불을 붙이게 했다. 야외 교장에서 40~80여 명의 피교육생들이 한꺼번에 빨아대면 마치 그 언저리가 불이 난 듯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 올랐다.

그 담배 연기에다 고향 생각 부모 생각을 실어 보내면서 힘든 훈련의 고달픔을 잊었다. 그렇게 내 몸에는 니코틴의 함량이 쌓여 갔다. 그리고 교단에 선 뒤 50분 수업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오면 담배를 꺼내 물고 피로를 풀었다. 나중에는 10분 쉬는 시간에 한대도 모자라서 두대나 태우고 다음 교실로 들어갔다.

30여 년 그런 생활이 습관화되자 일요일이나 방학에 집에서 지낼 때도 50분이 지나면 정확하게 흡연 욕구가 느껴졌다. 습관이란 참 무서웠다. 담배의 대가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이 마지막 거처로 적십자 병원에서 계실 때 임종 직전에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 분은 하루에 백개비나 태웠던 흡연 습관 때문인지 담배를 물지도 않았는데도 입술은 빠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교무실에서나 회의실에서 자유롭게 피울 수 있던 담배가 1980년대 말부터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담배 공해에 시달려온 여교사들이 치밀한 작전을 세운 바, 어느 날 회의 시간에 교무실이나 회의실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말자는 안을 내놓아 흡연자들이 방어할 틈도 없이 기습 통과돼 버렸다. 다음날부터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울 때는 흡연실로 가야했다.

그 불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무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10분 동안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교재 연구나 학급 사무 처리, 학생 상담 등에도 소홀해지는 듯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인이 박힌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가족, 특히 아내로부터의 ‘금연’ 잔소리는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동침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알량한 사나이의 '존심'을 내세우면서 흡연동지들과의 맹약을 이어갔다.

“선생님, 방금 담배 태우셨지요?”

2001년 겨울 어느 날 교실로 들어가자 한 여학생이 “선생님, 방금 담배 태우셨지요?”하고서는 책상을 교탁에서 한참이나 뒤로 물렸다. 그 순간 무척 충격을 받았다. '고객은 왕'인 세상에 아무튼 고객인 학생에게 염증을 주고서는 교단에 설 수 없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그때 나는 다음 학기에는 양단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마음 정리를 했다. 내가 담배를 끊느냐, 학교를 그만 두느냐. 곰곰이 생각하니 담배 때문에 평생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은 명분이 될 수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담배 하나 통제치 못한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 그러고도 글을 쓴다고…. 생각할수록 의지력이 약한 내가 미웠다.

게다가 당시 서울시 유인종 교육감의 특별 지시로 2002년 학기부터는 아예 학교를 금연 지역으로 선포한다는 내용이 전해져 왔다. 곧 학교 안에 흡연실조차 없애고 정히 피울 사람은 학교 밖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정말 아찔한 조치였다.

나잇살이나 먹은 늙은 교사가 교문을 들락날락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꼴이란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도록 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독한 마음으로 금연을 결심하고, 그 D 데이를 2002년 3월 2일 개학날로 잡았다. 그 전날 담배와 고별식을 한다고 남은 담배를 실컷 피웠다.

▲ 일본 아오모리현 도와다 호수의 '을녀 상'
ⓒ 박도
가장 힘들었던 금단 현상 극복

그날부터 금단 현상이 가장 힘들었던 석달간은 '정서 불안' 상태로 보내다시피 했다. 한때는 가슴이 빠개지는 듯하여 침도 맞기도 하고, ‘한대 만의 유혹’에 담배 자판기 앞에까지 갔다.

하지만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란 놈은 형편없는 놈으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비장감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담배 유혹을 떨치지 못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2003년 1월, 부산항에서 일본 하카다 행 밤 여객선을 타고 오륙도를 지날 때, 갑판에서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데 그 연기가 밤안개와 함께 내 후각을 무척 자극시켰다.

약간의 멀미 끼에다가 “한대만 태워, 글 쓴다는 사람이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무슨 글을 써!”라는 친구의 말에 손을 뻗치다가 그 담배를 받으면 말짱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 뒤로도 속이 상할 때, 그리고 글이 영 써지지 않을 때는 담배의 유혹을 엄청 받았다. 아무튼 지난 3년 동안 이런저런 사연으로 흡연 유혹을 받았지만 잘 넘겨 왔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나는 때때로 그 담배의 마력에 강한 유혹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의지가 그 욕구를 이겨내고 있다.

남은 날 줄곧 담배의 유혹에 이길 수 있도록 내 의지가 허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의지가 허물어지도록 열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일만은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이 세상 떠날 때까지 끝내 담배와 인연을 끊을지는 다 살고 난 뒤에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담배의 마력과 유혹은 그 뿌리가 끈질기다. 애초부터 담배를 아예 입에 물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서울에서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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