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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뉘우치며 살아간다

▲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지난 해 봄 외가 마당에 활짝 핀 배꽃, 어머니처럼 우아하다
ⓒ 박도
돌아가신 할머니는 서당이나 야학, 학교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하셨지만 체험에서 우러난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가운데 "막상 닥쳐봐야 그 사정을 안다"고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요즘이다.

열흘째 집안에서만 지내니까 좀이 쑤신다. 앞으로도 한 달 정도는 지나야 깁스를 풀고 얼마간 물리 치료를 받아야 정상으로 다닐 수 있다고 한다.

나야 일시적 장애지만 선천적인 장애인이나 후천으로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할지 그 사정을 요즘에야 어렴풋이 알겠다.

화장실 가는 일도, 몸을 닦는 일조차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나는 한쪽 다리만 깁스를 해도 그런데 두 다리가 장애인 경우는 얼마나 불편할까?

그런데 이런 장애는 누구에게나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장애인협회 통계자료를 보니까, 전국의 장애인 수는 450여만 명으로 전 인구의 10퍼센트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장애자의 통계이지, 여기다가 자그마한 장애와 정신적인 장애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것 같다.

33년 교단생활 가운데 20여 년 학급담임을 하였는데, 여러 장애 학생을 맡았다. 그 가운데 1984학년도 고2 때 담임한 박아무개군은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학생으로 날마다 어머니가 업고서 교실까지 데려왔고 종례 후면 데려갔다.

그는 조금도 성가시게 한 일없이 내 반에서 일년을 보내고 3학년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과 함께 그 어머니도 특별 개근상을 받아서 많은 학부모의 박수를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화장실에 갈 때는 친구들이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한두 번 아니 여러 차례 내가 시중을 들어줬을 것 같은데 그 시절 그냥 지나쳤다.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까 몹시 부끄럽다.

1972년 첫 담임을 할 때 출석부 1번이었던 성아무개군도 어릴 때 열병을 앓아서 한 다리를 조금 저는 장애 학생이었는데 그는 여태까지 나를 가장 많이 찾아 준 제자다. 올 설날에도 안흥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찾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언제 서울로 다시 오느냐고 보고 싶다고 울음 섞인 하소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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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짝 핀 복사꽃, 지난 해 봄 원주시 소초면 교항리에서
ⓒ 박도
그는 여태 가정도 꾸리지 못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다. 그는 삶의 고비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집으로 찾아와서는 한바탕 울고 간다.

이제까지 내가 그에게 해 준 것은 "참고 살아라"는 말과 요기나 시켜주고, 해진 신발이나 갈아주거나 약간의 차비나 쥐어 줬을 뿐이었다.내가 안흥으로 떠나면서도 그 녀석이 눈에 가장 밟혔다. 그는 안흥으로도 자주 문안 전화를 해왔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가 가장 슬프게 울어줄 것 같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에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회포나 풀어야겠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서울에서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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