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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일 선생의 책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 간)에 이런 글이 있다.

책장을 넘기다 말고 깊은 숨을 쉬며 행간의 벤치에 오래 머물러야 했던 책들, 그런 책들을 읽는 순간은 행복했다.(14쪽, 행간의 벤치에 앉다 부분)

우리가 한 권의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 책 속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마치 한 여인을 사랑하며 죽는 날까지 함께하는 것과 진배없으리라. 곁에 두고 몇 번이고 되읽어보는 즐거움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천상의 그것인지 모르겠다.

요즈음 같이 여러 분야에서 많은 책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마음에 드는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좋은 책이란 지은이의 맑고 깨끗한 마음과 자세를 책 속에 고스란히 옮겨놓는 것이며 또한 그 책을 읽는 독자는 그것을 알맞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랴. 거기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일말의 거짓도 내포되지 않는 마치 깊은 산속에서 사는 옹달샘과도 같은 것일 것이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간) 이 책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26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1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일하고 있는 김영두 선생이 풀어 책으로 낸 것이다.

두 사람은 명종 13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난 선조 3년(1570)까지 13년 동안 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이는 당시 교통 사정이나 체계적인 우편 제도의 부재 등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숙한 선비 정신에서 비롯된 학문의 정진에 대한 각별한 배려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학문의 도야를 위해서 나이와 벼슬의 높고 낮음에 관계치 않고(이런 관념적 사고에서 자유로웠겠지만) 서로 갈고 닦은 학문의 기량을 유감없이 토론하는 장으로서 긴 세월 동안의 서신 교환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삼가 여쭙니다. 그리는 마음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달 초순에 성은을 입어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사간원 헌납獻納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두 번이나 임금의 교지를 받았으므로 의리로 보아 편안함만을 구하기 어려워,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또 의정부 검상檢詳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여러 번 관직을 옮기며 부분, 159쪽, 1-36 고봉이 퇴계에게, 이지사 댁으로)
-절하며 답합니다.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병을 무릅쓰고 입직하고 있다니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고친 싯귀는 뜻도 깊고 가락도 맞습니다. 옛말에도 시는 고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황.(시는 고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부분, 253쪽, 1-82 퇴계가 고봉에게, 우부시사 앞으로)
-지금까지 “사물의 이치에 이른다.(物格)”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에 대한 주장은 저의 견해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또한 이미 고친 내용을 베껴서 그대에게 전하라며 이정에게 맡겼습니다.(제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부분, 348쪽, 1-114 퇴계가 고봉에게, 기승지 댁으로)


이렇듯 허물없이 주고받은 두 사람의 편지는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고 오늘날에도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첫번째 의미는 두 사람이 학자가 정치에 참여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과 토론을 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두 사람이 가고자 한 학문을 어떻게 연구할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독자적으로 한국 주자학을 성립했다고 평가받는 사단칠정론을 담고 있다. 이렇듯 608쪽 분량에 해당하는 13년간 주고받은 편지는 퇴계가 세상을 버림으로써 중단됐다.

물론, 사단칠정론 같은 철학 이론은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 매우 힘들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라면 고매한 학식의 깊이와 진정한 학자로서의 길을 간 그들의 열정 앞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리라.

학자로서 자기완성을 위해 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크나큰 숙제는 대학자와 청년 학자 모두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절실하였다. 두 학자는 결국 전생애을 통틀어 학문의 사색을 게을리 하지 않은 진실한 선구자였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문학 동지로 만나 문학에 관하여 진솔한 편지를 나누어 서로 문학과 학문의 자질을 높이고 동지로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가져본다.

아, 한권의 책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 기사를 다 읽으신 분들에게 드리는 나의 순수한 열정이며 덤이리라. 그리고 나는 이러한 또 다른 서한 문학을 찾고자 한다.

<필담, 구니오와 미나에의 문학편지>(김춘미 옮김·현대문학 간) 이 책 또한 일본의 유명한 두 소설가가 1년 4개월여에 걸쳐 주고받은 서한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쓰지 구니오와 미즈무라 미나에는 이 서한을 주고받는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공방과 교감을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미즈무라 미나에님. 칠석날 보내주신 편지에는 격렬한 정념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더군요. 저 또한 에밀리 브론테를 만나러 무덤 저편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미즈무라님은 애당초 이 세상에서 ‘좋은 작품’이 남는다는 보장은 없다, 쓴다는 것은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쓴다는 것의 근원적 의미 부분, 84쪽)
-디킨스만큼 독자를 순수하게 즐겁게 해주는 작가는 없지 않을까요? 스토리가 가끔 부자유스러운 점, 등장인물들이 유형화되어 있는 점, 많은 에피소드들이 센티멘털리즘에 빠져 있는 점 등이 흔히 디킨스의 결점으로 지적되지만, 그 모든 결함들을 아무래도 상관없게 만드는 재미가 그의 작품에는 있습니다.(디킨스의 소설을 읽는 기쁨 부분, 97쪽)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소나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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