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감교련(甘嬌蓮)은 기이한 느낌에 눈을 떴다.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며칠을 깊이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어제는 이른 시각에 냉약빙이 와 있음을 알고 잠이 들 수가 있었다.

“….”

침실 저편에 불이 켜져 있다. 냉약빙은 잠을 자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일까? 그녀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상체를 비스듬히 세우려 했다. 헌데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기이했다.

무엇인가 미끈거리는 액체. 그녀는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보는 순간 짧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악……!”

수급(首級)이다. 산발한 머리채가 흐늘거리고 침상 위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바로 자신의 시녀인 소하(小蕸)의 머리였다.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른다.

그녀는 새장 속의 새처럼 살아 온 여자였다. 양만화에게 시집와서 지금까지 그녀는 이십오년을 자신이 결정해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양만화가 해 주었고, 장관사가 해주었으며, 하인, 하녀들이 알아서 다 해주었다. 주방에 들어갈 일도 없었고, 시장을 봐야 할 일도 없었다.

그녀가 한마디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벌레 한 마리에 “이걸 어째”하면 그 즉시 눈에서 사라졌고, “살결이 거칠어진 것 같아”하면 그 즉시 양유(羊乳)가 가득 담긴 목욕통이 놓여 있었던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약빙, 약빙.”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냉약빙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여기에 없소.”

중년사내의 목소리다. 자신의 침실에 들어올 사내는 오직 남편뿐이다. 하지만 남편 목소리가 아니다. 그녀의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누, 누구?”

침실 저편 불이 밝혀진 곳에 목상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감...감..히 여기가 어디라고....썩...나...나가...지 못하겠느...냐...”

호통을 친다고 했지만 이미 입안에서만 맴도는 소리다.

“나는 나가지 않소. 교련(嬌蓮)!”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오직 남편 양만화뿐이다. 그녀의 시선에 비치는 중년사내의 모습. 얼굴에는 두 줄기 검흔(劍痕)이 자리하고 있고, 머리는 반백이 되었지만 얼굴선이 뚜렷한 모습이다.

“…!”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다. 바로 그다.

꿈 많던 소녀 시절 자신을 안아주며 부드럽게 속삭여주던 바로 그다. 처음으로 입맞춤의 달콤함을 가르쳐주고, 은밀한 손길에 달뜬 신음을 뱉어내게 했던 그다. 집안이 몰락하고, 그래서 혼약이 파기되었으며 수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우게 했지만 이제는 잊어 버렸던 그다.

“아윤(我允), 당신, 정말 아윤?”

아윤은 연인이었을 때 부르던 감미로운 호칭이다.

“그렇소. 당신의 윤이오.”

소윤(蘇允)이다. 양만화가 감교련을 차지하기 위해 망하게 했던 소가의 아들이다.

“…!”

이건 꿈이다. 요사이 초혼령으로 인하여 시달린 끝에 꾸는 악몽(惡夢)이다.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 더 잘 안다. 꿈이라면 소윤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그녀는 그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소문은 진실이었다. 그의 오른쪽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파혼 후 그는 거의 매일같이 자신의 집을 찾아 왔었다. 하지만 부친의 금족령으로 인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양만화와 다른 사랑을 시작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리고 양만화는 소윤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었다. 그 뒤에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그녀의 귀에 들려와도 애써 모른 체하려고 노력했던 소문이었다.

“나는 련매를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소.”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간절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십오년 동안 그는 정말 그녀를 잊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녀를 반드시 찾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지금이 그때다.

“련매는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는구려. 아름답소.”

그는 침상 가까이에 다가가 침상 옆의 등에 불을 붙였다. 아름다운 그녀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속살이 훤히 비치는 나삼만을 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끌어당기다가 피가 엉켜 끌려오지 않자 이내 포기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요?”

양만화의 장원은 경비가 삼엄한 곳이다. 더구나 요사이 초혼령으로 인하여 물샐틈없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는 내가 가고자 하면 어디든 가오. 이곳도 마찬가지요.”

그의 투박한 왼손이 감교련의 볼을 어루만지려 다가들었다. 옛날 그들이 연인이었을 때 그는 그녀의 얼굴과 목과 그리고 가슴을 어루만졌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은근히 그의 손길을 즐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만지지 말아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에요.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어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육체다. 약간 살이 찐 듯한 그녀의 몸에서는 참을 수 없는 여인의 육욕(肉慾)이 흐르고 있었다.

“련매. 당신이나 나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소. 나는 당신이 양만화 그 짐승 같은 놈에게 시집 간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소. 아직 우리에게는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소.”

이 사내는 지금 무엇 하고자 함인가?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물론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고, 아직까지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양만화와 달리 그는 부드러운 남자였다.

“나는 이미 그의 아내에요. 그와 이십오년 동안 살을 섞으며 살아왔다구요. 이미 쌀이 밥이된 이 마당에 무엇을 바라는 건가요?”

“나에게서 당신을 빼앗아 간 돼지 같은 양만화는 이제 죽을 것이오. 이 장원에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오. 유일하게 당신만이 살 것이오.”

그의 검흔이 그어진 눈가에 일어나는 잔경련과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쏘아 나왔다.

“당, 당신 초혼령과 관계 있나요?”

감교련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옛날의 정인(情人)은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초혼령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대답이 나오지 전에 어디선가 곡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대천신계(戴天愼戒)…”
“아 악----!”

영(靈)을 부르는 초혼(招魂)과 더불어 비명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똑똑, 또르르.
“나무아미타불.....”

목탁소리와 함께 요령, 북소리까지 들리며 범패(梵唄)가 이어진다. 영혼을 달래는 지장경(地藏經)의 한 구절이 언뜻 그녀의 귓속을 파고든다. 초혼이 이루어지고 진혼(鎭魂)이 뒤따르고 있다.

“왜, 당신 복수를 위하여?”

“한 가지 이유는 되겠지만 양만화는 반드시 죽어야 할 자요. 그는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이오.”

감교련의 얼굴에 체념이 흘렀다. 준비가 완벽하다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사내가 자신의 침실까지 들어와 있다면 그 준비는 아무 소용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生)을 마감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새장에 오래 갇혀 있던 새는 문을 열어도 날아가려 하지 않는다. 새장 안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