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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것은 듣기만 해도 유쾌하고 가슴 설레는 어휘다. 판박이 같은 일상의 탈출구들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들의 여행기록을 접하면서 대리만족을 얻으며, 기회가 오면 반드시 어느 곳은 가보리라 다짐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기는 무엇보다도 다정다감한 사람들의 몫이어야만 한다.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은 이런 관점에서 그야말로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포구들을 찾아다닌 시인의 발품이 만들어낸 기록물이 <포구기행>이다. 필자의 천직이 시인이므로 이 서책에는 여느 여행기들과는 달리 시와 시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얼굴을 내민다. 서문 격인 '섬에서 보낸 엽서'의 한 구절을 보자.

당신이 바닷속 깊은 어딘가에서 아주 근사한 시를 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요. 아주 깊은 바다 어딘가에 당신이 시를 써서 읽어주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극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 축제, 꿈, 기억, 방랑… 당신이 일러준 삶의 비밀 하나로 나뭇잎 같은 내 인생이 가끔은 파도처럼 술렁이는 꿈을 지니기도 했지요.(8쪽)

해신(海神)이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맑은 영혼을 드러내는 일, 즉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거라는, 참으로 시인다운 발상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의 작업이 창출한 결과를 낭송하는 그리 크지 않은 극장이 있고, 거기서 뭍 생명들이 각자의 내면을 전신으로 향유하는 시간을 생각해내는 시인의 상상력으로 우리는 따뜻해진다.

대한민국 세 바다의 항구들과 점점이 떠 있는 섬들과 해수욕장과 '만灣'에 대한 따사롭고 넉넉한 이야기들이 <포구기행>의 책장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풍광 수려한 반도의 여러 섬들과 해안풍경, 그리고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내력과 사연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진도 인지리에서 남동리 포구로 가는 길'에서 시인 곽재구는 조공례 할머니를 만나고 그이에게서 '육자배기' 가락을 얻어듣는다. 소리를 하는 도중에 만난 할머니의 형형한 두 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인생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와 눈빛의 향연으로 축복받은 시인은 여로의 끄트머리에서 시 한 편을 쓴다.

진도 지산면 인지리 조공례 할머니는/ 소리에 미쳐 젊은 날 남편 수발 서운케 했더니만/ 어느 날은 영영 소리를 못하게 하겠노라/ 큰 돌멩이 두 개로 윗입술을 남편 손수 짓찧어 놓았는디/ 그날 흘린 피가 꼭 매화송이처럼 송이송이 서럽고 고왔는디/ 정이월 어느 날 눈 속에 핀 조선매화 한 그루/ 할머니 곁으로 살살 걸어와 입술의 굳은 딱지를 떼어주며/ 조선매화 향기처럼 아름다운 조선소리 한번 해보시오, 했다더라/ 장롱 속에 숨겨둔 두 개의 돌멩이를 찾아와/ 이 돌 속에 스민 조선의 핏방울을 꼭 터뜨리시오, 했다더라 (105-106쪽)

젊은 아내가 육자배기에 취하여 섬을 떠돌며 노래하는 것이 못마땅한 지아비가 돌멩이로 짓찧어버린 윗입술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소리를 해야 했던 조공례 할머니의 기막힌 사연을 시인은 담담하게 풀어낸다. 할머니의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그는 조선매화와 견줌으로써 끈질기되 향기 드높은 미적-예술적 성취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곽재구 시인은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서도 안쓰러운 시선을 던진다. 전북 고창의 포구 구시포의 본래 이름은 '새나리불뜽'이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이름이 일제시대에 구시포로 바뀌었다고 전하면서 시인은 순 우리말로 이루어진 포구 '새나리불뜽'의 의미를 설명한다.

새나리의 '나리'는 갯가를 의미하는 우리말이요, '불뜽'은 아마 '불뜸'에서 전이된 말일 것이다. '뜸'은 우리말에서 자연부락을 뜻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구시포의 옛 이름은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쯤이 된다.(200쪽)

'새나리불뜽'이 일제의 강압 때문에 구시포로 바뀌고, 그곳의 대표적인 명물이었던 해당화마저 당뇨병에 특효란 소문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황량함을 시인은 서러워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훈훈한 만가를 시인은 흉중에 오래도록 품고 오늘도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매우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시인이지만 곽재구의 내면에는 인간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 먼 곳, 푸른빛의 별들이 꿈처럼 빛나고'에서 시인은 잉여의 노동을 거부하는 어청도의 늙은 어부에 대하여 소략하게 쓴다.

노인은 고기를 잡지 않았다. 달빛들이 스러질 무렵이면 노인은 그물을 걷고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파는 노동은 평온할 수가 없다. 하루의 노동이 자신의 하루 생계의 몫을 넘어서고, 더 더욱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몫을 침범하는 경우라면 그 노동은 신성함을 잃는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의 노동은 무능력한 것이었다.(53쪽)

만월의 밤바다에서 푸른색의 그물을 던지고 푸른빛의 고기들을 잡는 듯 마는 듯하는 노인의 평온한 노동에서 곽재구는 하루의 소용을 깨달은 자의 진실한 면모를 독서하는 것이다. 시인은 일용할 양식에 충분히 만족하고 잉여의 노동으로 자신의 육신과 타인과 고기들을 괴롭히지 아니하는 진정 풍요로운 자의 무능력이 숨쉬는 어청도를 그림처럼 그려낸다.

<포구기행>은 단지 읽을거리로만 풍성한 서책이 아니다. 시인이 발품을 팔아 기록한 사람과 자연의 풍광이 아름다운 사진들로 더욱 그 빛을 환하게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닿고 만나본 포구와 바람과 갯벌과 백사장과 그곳에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의 온갖 삶들의 양태가 천연색 사진들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마음과 푸근한 서정으로 남다른 여로를 택한 시인 곽재구의 독특한 <포구기행>은 여적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푸근한 인심과 포구의 다채로운 면면들을 간결하고 꾸밈없이 보여준다. 혹자는 좁은 한반도, 더욱이 분단된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말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자연과 산천, 그리고 그곳의 인간들과 삶의 내력을 알고 있는 것일까!

곽재구의 포구기행 - 꿈꾸는 삶의 풍경이 열리는 곳

곽재구 글, 해냄(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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