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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허선사의 시선이 좌중을 바라보다가 서가화에게 돌려졌다.

“서장군가의 물건도 보여주시겠소?”

표물. 그것은 단지 송하령의 밀지만이 아니었던가? 서가화는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지자 고개를 잠시 숙였다. 좌중의 시선이 서가화가 꺼내 든 보석함에 쏠렸다. 보석함에는 정교한 장식이 되어 있어 꽤나 귀중한 것으로 담은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할아버님께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실 때 태조께 직접 하사받은 물건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칠 개월 전 이 물건을 노리는 자가 있었지요.”

“서소저의 숙부인 절강성(浙江省) 서경(徐慶)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가 살해된 것은 그 물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오?”

철골개의 말에 서가화는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 개방이다. 중원 무림 뿐 아니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개방의 정보망에 걸려든다.

“그 사건은 금의위에서 조심스레 조사한 것으로 아는데 개방에서 이미 알고 계셨군요.”

놀랍다는 의미이다. 죽은 모습이 외부로 알려지기엔 가문의 흉이 되어 은밀하게 처리했던 일이다.

“금의위의 조사를 덮고 본가에서 직접 조사한 결과로는 바로 이 물건을 요구한 자들의 짓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아직까지 추적하고 있지만 밝혀낸 것은 별로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서장군가의 위세는 아직 전 중원을 흔들 정도다. 그 가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관과 무림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강남서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가의 인물을 죽이고 물건을 노렸다. 관과 무림을 상대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는 하지 못할 도발이다.

“그래서 소녀의 부친께서는 이 물건이 개인의 물건이 될 수 없다하여 소림에서 맡아 주시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광허선사는 서가화의 말에 가져 온 보석함의 봉인을 뜯고 그 뚜껑을 열었다. 갑자기 실내는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보석함에서 쏘아져 나오는 붉은 빛의 광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붉은색의 엄지손 크기의 타원형보석이었다.

“정말 적멸안(寂滅眼)이로군!”

듣는 이의 머리가 아플 정도의 경악에 찬 침음성은 한쪽 구석에서 아무런 말도 않고 있던 노승이었다. 얼굴은 나이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주름살이 피었고, 죽음의 꽃이라는 검버섯이 얼굴과 손등을 덮고 있는 노인네였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었다 하더라도 승이라 하기엔 기이한 분위기를 보이는 노승.

“광명(光明) 사제.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겠소?”

무림의 사형제는 대개 나이순으로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먼저 입문한 사람이 사형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다. 분명 광허방장보다는 광명이라 불리는 노승의 나이는 십여세 이상 많은 것 같았다. 광허선사도 사제라 하면서도 말을 높이는 것을 보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으음.........내 생전에 다시 한번 보게 되다니.....”

적멸안이란 보석을 바라보는 광명선사의 눈 속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격동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회한과 적의(敵意), 분노와 기쁨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적멸안이 무엇인지 아는 좌중의 얼굴에는 경악에 찬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성화령(聖火令)!
성화령(聖火令)은 백련교의 교주(敎主)가 가진 신물(信物)이다. 본래의 백련교에는 교주 신물이 없었으나 민중 종교와 혼합되면서 배화교(拜火敎)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신물이다.
본래의 모습은 손으로 잡게 되는 한자 정도 길이의 봉(棒)에 연꽃 모양의 대(臺)가 있으며 그 연꽃대 안에 적멸안이 있다. 백금(白金)과 현철(玄鐵)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성화령은 흰색의 광택을 뿜으며 고온과 극빙에서도 변화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붉은 눈을 가진 고양이의 눈을 닮았다는 적묘안석(赤猫眼石)이라는 희귀한 보석을 세공하여 만들었다는 적멸안은 백련교를 사교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악마의 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게되고 혼을 빼앗긴다고도 한다.

백련교의 교도라면 누구라도 복종해야 하는 교주의 신물. 특히 백련교의 의식을 치를 때 필요한 불을 얻을 때 사용된다고 전해진다.

“.........”

광허선사로부터 적멸안을 받아 든 광명의 얼굴은 아직도 수십번의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미 모든 욕심을 버렸을 팔순이 넘어 보이는 그에게도 적멸안에 대한 감회는 아직 버리지 못하였음일까? 하지만 적멸안을 자세히 살피던 그의 표정에 의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가사에 세심하게 문지르며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야....이게 아닌데.....”

그의 고개가 갸웃거리고 있었다. 중얼거림도 계속되었다. 그러다 그는 양손 가운데 적멸안을 끼우고 합장한 자세로 운기하기 시작했다.

헌데 이게 왠일일까? 소림 노승의 전신에 피어오르는 섬칫한 사기(邪氣).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소림 방장의 사제라는 사람이 어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케 하는 저런 사악한 마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에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사기였다. 좌중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오르자 광허선사가 나직히 입을 열었다.

“광명사제는 과거 백련교의 광명좌사(光明左士)였소. 그러다 사부님의 설득으로 소림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한번도 산문 밖을 나간 적이 없지요.”

좌중은 또 한번 놀라고 지금의 현상을 이해했다. 백련교에 있어서 광명좌사는 광명우사(光明右士)와 함께 교주를 보필하는 최측근이자 최고 수뇌부이다. 쉽게 백련교 내에서는 일인지하(一人地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는 자리다. 더구나 무공에 있어서는 백련교주를 능가한다는 말이 있는 광명좌우사다.

그런 그가 소림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고, 그의 지독한 사기(邪氣)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왜 나이가 더 많은 광명이 광허선사의 사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광무선사는 이미 광명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를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갈무리하고 있었다.

“.......!”

광명의 합장된 손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되 암영(暗影)이 진 듯하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합장된 손 사이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팍----!

그와 동시에 광명은 운기를 멈추고 손바닥을 아래로 늘어 뜨렸다.

“아미타불...이건 가짜요. 재질은 적묘안석이 맞기는 한데 진짜 적멸안은 아니오.”
“사제....!”

이미 광명의 손바닥에는 수 십 개로 바스러진 조각들이 보였다. 보석은 돌과 다르다. 그 재질의 단단함이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적묘안석도 마찬가지다. 그런 적묘안석을 가루와 같이 만들어 버렸다.

“방장. 진짜 적멸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그 안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볼 수 있소. 물론 진짜 불꽃은 아니지만 어떤 빛이던 받아들어 굴절시켜 일어나는 현상이오.”

그래서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가는 마물이라 불렸나 보다.

“하지만 쌍수에 끼고 백련교 내공심법을 운용하면 불꽃을 피어 올리는 것이 진짜 적멸안이오. 백련교의 의식에 필요한 모든 불은 적멸안의 불꽃으로 점화(點火)해야 하는 것이오. 연화대에 넣어 만든 이유도 본래 적멸안의 화기를 다룰 수 있게 함이오. 더구나 진짜 적멸안은 웬만해서는 부서뜨릴 수 없소.”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서가화가 가지고 온 것은 가짜다. 좌중의 시선이 서가화로 향했다. 서가화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당혹스런 일이다. 저 물건이 무엇인지 이곳에서 봉인된 보석함을 열기 전에는 자신도 본적이 없다. 그렇다고 저 물건을 품에서 빼본 적도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도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광명의 입에서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불호가 튀어 나왔다.

“아-미-타-불!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가? 아마 이 손에서 부서져 버린 적묘안석은 아마 그동안 대용으로 사용하던 것일테지. 이미 바꿔치기 한거외다....허허.. 이 일을 어찌할꼬......?”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괴로움이 가득하였다. 고통과 회한...그리고 불신과 체념...

백련교도들의 조직과 습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다. 그 조직을 이끌었고 지금도 자신은 그 조직을 배반했다는 자괴감에 뼈를 깎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다. 그의 실성한 것 같은 모습에 광허선사는 마주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사제...”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맑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아니오...허허...어찌 아직까지 육신을 버리지 못해 이런 고통을 보게 되는지... 노납은 참회동(懺悔洞)에 들겠소.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득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걸린 염주는 쉴 새 없이 돌려졌다.

“어쩌면 조만간 무림과 황실에 큰 피바람이 불거요. 그들의 분노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 일테니...지금부터라도 힘을 모으고 대비하시오. 이 사제가 마지막으로 소림을 위해 충고하는거요.”

광명은 고개를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우려한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다.

“사제....!”

사부는 광명을 자신의 사제로 정해 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대하기 어려운 사제였고 몸은 산문 안에 있어도 언제나 사제의 눈은 속세에 가 있었다.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그는 별로 말하지 않았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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