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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에인 역시 새벽녘에야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 방은 전에 군주의 관리들이 쓰던 집무실로 책임선인이 잡다한 집기를 들어내고 에인의 처소로 개조한 것이었다.
해가 중천을 향해갈 때 닌이 그 방에 들어왔다. 에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닌은 침대 곁으로 가만히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깎은 상아 같은데 그 표면으로는 투명한 아지랑이가 잔잔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따스한 물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의 피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얼굴에 씌어진 투명한 아지랑이가 그녀의 손길을 그렇게 가로막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다시 좀 더 힘을 주어 쓰다듬어보았다. 그래도 에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침대 앞에 앉았다. 그가 깰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엔 확답을 들어야 한다. 언제 닌을 자기 신부라고 만천하에 공표할 것이며, 그 결혼식은 또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멜루하에서 첫날밤, 열 번의 사랑을 나눈 뒤 날이 밝았을 때, 그때서야 나의 님은 내가 닌임을 알아차렸지. 비록 그이는 내게 당신은 내 신부라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밤마다 사랑을 나누었지. 사랑을 나눈 뒤 그이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할 게 많아, 닌, 나는 생각할게 너무도 많아' 그렇게 변명을 했지만 다음 날이면 또 내 침실로 왔지.

'닌, 내 머리는 명상을 요구하는데 내 육신은 늘 이렇게 당신을 부른다오. 오, 닌, 대체 난 누구며 지금 어디 있는 것이오?'

내 가슴으로 파고들면서도 그이는 그런 말을 했어. 내가 일러주었지.

'당신 머리는 천신의 것이오, 당신 육신은 닌의 것이지요.'

닌이 그렇게 멜루하에서의 사랑을 되새기고 있을 때, 황홀하게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에인이 깨어났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 닌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 온몸이 격렬한 반응을 하면서 사랑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더 참을 수가 없어 자기의 님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오, 내 사랑…."

그러나 에인에게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닌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앉아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잠결인가? 닌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에인의 얼굴에서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은 그대로 감고 있는데 그 빛만이 점점 더 밝아졌다.

방안엔 에인의 얼굴만이 태양처럼 둥그렇게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빛나면서도 닌이, 그의 신부가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닌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신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닌은 눈을 감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온지 오래되었소?"

마침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닌이 눈을 떠보니 그는 미소를 머금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닌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방금 전에…."
"무슨 급한 일이 있소?"

닌은 에인의 그 말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나서도 급한 일이 있느냐고 묻다니, 나의 신랑은 내가 자기의 신부라는 것을 잊어버렸는가? 석 달간이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것도 잊었는가?

그러자 또 그녀 온몸이 사랑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지금 당장 그러고 싶다는, 그래서 우리는 애초부터 이렇게 신랑 신부였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닌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이 열려 있는지, 아직도 신성에 잠겨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가 신성에 닿아 있을 때는 아까처럼 그녀가 껴안아도 모를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이렇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언제 같은 방을 쓰지요?"
"건 무슨 뜻이오?"

에인이 얼른 그렇게 반문했다.

"이제 군주가 되셨으니 저도 군주의 신부가 아닌가요?"

그러자 에인이 닌을 똑바로 쳐다보며 되물었다.

"우리가 언제 결혼식을 올렸소?"
"결혼식도 빨리 올려야지요."
"그럼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왜 벌써 신부라고 말했소?"
"이미 우린 그렇게 정해진 사이가 아니던가요?"
"그건 누가 정해준 사이오?"

닌은 그만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어떤 경우가 온다고 해도 에인이 자기에게 그런 모욕은 줄 수가 없었다. 닌이 발끈해서 되물었다.

"그럼 장군께서는 닌이와 결혼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에인이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전에는 그러했소. 아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소."

에인의 언어는 그 하나하나가 목책이었다. 마치 나무로 칸막이를 새워두고 거기에서 문이 될 곳을 찾으라는 식이었다. 닌은 그의 어법을 해독할 줄 알았다. 지금도 거기 문이 보였다. 닌이 얼른 되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은 어떤가요?"

역시 닌의 예측이 옳았다. 에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확실한 것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이오."
"때가 아니라면?"
"닌이는 아직 나이도 차지 않았지 않소?"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구?"
"그럼 저와 결혼하면 또다시 유배를 당할까봐, 그것이 두려우신가요? 지금도 그러신가요?"

에인이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 그가 웃는 것은 세워든 언어의 목책이 저마다 모두 문이라는 뜻이었다.

"아니오."
"그러면?"
"난 그 제도를 지켜주고 싶을 뿐이오."
"제도를 지키다니요? 난 딜문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아버지도 거기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왜 니푸르 제도를 지켜야 하지요?"

에인이 신발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닌, 이만 나가보시오. 난 지금 그런 얘기할 시간이 없소."
"그럼 말해주세요. 우린 언제 결혼 이야기를 하지요?"

닌이 바짝 다가들며 물었다. 에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따뜻하고도 부드러웠다. 그러자 닌의 몸에서 다시 사랑의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한데도 에인은 그저 그녀 이마에 걸린 머리카락만 걷어주었다.

"닌, 좀더 기다렸다가, 닌이 적령기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때 문밖에서 책임선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장군님, 회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모두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겠소. 곧 나가리다."

에인이 대답한 후 신발을 신었다. 끈을 다 묶고 났을 때 닌이 물어보았다.

"그러면 저는 그때까지 이 성에 머물 수는 있는가요?"
"닌, 닌은 부상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소?"

그리고 그는 뚜벅뚜벅 걸어 문밖으로 나갔다. 그가 그녀를 두고 떠났음에도 닌의 가슴엔 기쁨이 용솟음 쳐 올랐다.

'내가 부상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 아아, 그이는 이미 나를 신부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전투에서는 아내인 내가 그의 부상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바로 그런 뜻이었다….'

닌은 기뻐서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녀는 가슴을 꼭꼭 눌러 진정시킨 다음 흐트러진 에인의 침소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환인천왕은 하늘 호수로 돌아가셨지.
하늘 호수가 천산까지 내려와 환인천왕을 살포시 떠안고 올라갔다지.
그리고 호수는 다시 내려와 내 신랑의 눈에 깃들었지.
맑고 투명한 내 신랑의 눈, 나는 그 호수에서 날마다 목욕을 하고 있었다네.
순결한 신부가 되어 목욕을 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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