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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강한옥 할머니. 늘 밝으시다.
ⓒ 느릿느릿 박철
엊그제 내린 비로 모든 산천초목이 초록빛을 띠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한기봉(86) 할아버지 강한옥(80) 할머니 댁을 찾았습니다. 두 분의 안부가 궁금해서 나선 길이었습니다. 한기봉 할아버지와 강한옥 할머니는 두 분 다 80고령이지만 우리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 난 분들입니다.

내가 교동에 이사 온 지 8년째 접어들면서 아무 때고 찾아가면 지극하게 환대를 해주시고, 돌아올 때는 하다못해 계란 꾸러미라도 꼭 들려주십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해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드나듭니다. 두 분 다 황해도 신계군이 고향인데 6·25전쟁 때 잠시 피난을 와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지금껏 눌러 살게 되었다 합니다.

"목사님, 말마시기여. 연백에서 교동으로 피난 올 때 큰딸이 9살이고 세살 터울로 6살, 3살 그랬지. 그 어린 것들을 하나는 업고, 양손으로 하나씩 붙잡고 저 양반은 지게에 짐을 지고 한밤중에 거룻배를 타고 왔지. 걸리면 죽는 거야요. 얼마나 무섭던지. 교동이 한 서방 고향이라고 해서 믿고 내려왔시다. 막상 교동에 피난을 왔더니 몇 년째 흉년이 들어서 다 풀죽을 쒀먹고 살더라고요. 그때 '3년 숭년(흉년) 뭐 있꽈네?(있겠나?)'라는 말이 유행을 했지요.

연백에 살 때는 논도 크고 수리조합이 있어 물 걱정 안 하고 농사지었는데, 여기는 건파나 부쳐서 농사를 짓는데 그나마 흉년이 들어 수확이 없으니 사는 게 형편없었지요. 그래도 우리는 피난민이라고 옥수수가루, 밀가루, 우유 배급을 주데요. 처음에는 그거 얻어먹고 살았지요.

그렇게 우리 다섯 식구가 4-5년쯤 그럭저럭 살다가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시아버님이 연백에서 배를 타고 탈출해 왔어요. 그러니 어떡하겠시까? 먹고는 살아야 하겠기에 악착같이 일했시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한밤중까지 간사지 땅, 잔데나 나문재 외에는 살 수 없는 소금 땅을 쇠스랑 하나로 일궜지요. 그렇게 맨손으로 3천명 땅을 일궜시다. 또 남의 땅 2천 평을 더 부치니까 그럭저럭 먹고 살만합디다."

▲ 강한옥 할머니와 한기봉 할아버지. 늘 다정하시다.
ⓒ 느릿느릿 박철
- 그런데 어쩌다 할아버지가 집을 나가게 되셨어요?
"우리 시아버님이 매우 엄격하시고 무서우셨어요. 셋째아들을 낳고 살만하다 했더니, 저 양반이 화투를 하더라구요. 그러다가 빚을 좀 지게 됐어요.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께 맞아 죽을까봐 그랬는지 집을 나가고 말았시다.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혔죠. 시아버님은 범같이 무섭지, 애들 넷을 기르면서 계란 하나를 마음대로 못 삶아 먹었어요. 그래도 어떡하겠시까? 내가 나자빠지면 애들 거지 될까봐 악착같이 살 수밖에요. 저 양반이 어디 있는 줄 알아야 찾아가보지. 그때 용하다고 소문 난 무당을 다 찾아가 봤어요. 그런데 소용없더라구요."

- 그럼, 할아버지는 가출했다 몇 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저 양반이 집을 나갔을 때 우리 큰딸 옥숙이가 13살이었을 거야. 저 양반이 집을 나가고 8년이 지나 큰딸이 가을에 결혼하고 나서 동짓날이었어요. 마침 그날은 큰 딸애가 시집갔다 처음으로 친정집을 찾아 온 거야요. 그걸 여기서는 새길이라고 해요.

저녁에 어둑어둑해져서 부엌에 들어가 불을 때고 있는데 누가 문밖에 서서 "옥숙아! 옥숙아!"하고 큰딸을 부릅디다. 밖을 내다보니 웬 사람이 어깨에 배낭을 메고 서있는데 애들 아버지가 틀림없었어요.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잠시 후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시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가더니 하나도 나무라지 않고 목을 끌어안고 우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한기봉 할아버지가 끼어들었습니다.

"내가 그때 퍼런 돈 두 상자 90만원을 벌어왔어요. 우리가 그동안 개간한 땅이 실질적으로는 소유주가 정부 것이었지. 그래서 그 돈을 주고 샀지."

한기봉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86세입니다. 타고난 건강체질이십니다. 허리도 꼿꼿하시고, 잠시도 가만 계시질 않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를 지나가는 모습을 뵈면 여느 청년 못지않을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한기봉 할아버지와 강한옥 할머니는 부부로 64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차례도 다툰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꼭 존대를 하십니다.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입니다.

▲ 두 분이 다정하게 밭에 두엄을 주신다. 농사는 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다.
ⓒ 느릿느릿 박철

"우리집이 이만큼 사는 것도 다 할멈 덕분이시다. 나는 집안일 일체를 할머니께 맡기고 소소한 걱정은 안 해요. 다 참고 다 잊고 사는 거지 뭐!”

두 분 다 부지런하십니다. 넓은 밭에 풀 한 포기 보이질 않을 정도로 하루 종일 밭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제초제 살충제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도 무얼 심든지 잘 됩니다. 그만큼 공을 들인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 큰사위가 와서 한다는 말이 '어머니 마늘도 잘 됐고 다 잘 됐시다. 땅이 좋아서 그런가 보지요?' 그러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래' 그러나 속으론 '좋은 땅이 저절로 되나?' 그랬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늙은이들이 뭘 배운 게 있겠소. 그저 밥이나 먹고 일하는 게 제일이다 하고 산 것이지. 우리 두 늙은이는 배운 게 없으니 그래도 농사가 제일이다 하고 살았시다.

농사도 머리를 써야 돼요. 욕심을 부리면 농사도 안돼요. 많이 거두겠다고 너무 바투 심으면 안돼요. 마늘 한 가지를 심어도 좀 널찍널찍하게 심으면 알도 굵고 좋아요. 우리는 이렇게 살망정 아들딸들은 도시로 가서 정할 것이 없으면 구두를 닦고 먹고살아라 했더니, 내 소원대로 다 됐시다. 아들 딸 7남매가 다 집 장만해서 든든한 직장 생활하면서 사니 부러울 게 뭐가 있겠시꺄?

우리 두 늙은이 가난하게 살았어도 빚은 안지고 살았어요. 작년까지 나무 해다 때다가 이제 기름 때고 살게 되었으니 이만큼 사는 것도 감사해요. 젊어서 고생하다 늘그막에 호강하고 살아요. 우리 두 늙은이 행복해요. 그래도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빨리 하늘나라 가는 것밖에 없시다. 이제 가면 편안하지."

▲ 한기봉 할아버지. 86세 고령이신데 자전거를 즐겨 타신다.
ⓒ 느릿느릿 박철
타관으로 나가서 20년을 넘게 살다가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같이 사는 큰아들 한대현(60)씨가 다음과 같이 한마디를 거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참 재미있게 사시는 분들이에요. 한 번도 다투시지 않고.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셔도 정이 깊으시고 심지가 굳으신 분이지요. 어머니는 평생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도 허투루 하는 게 없이 반듯하신 분이에요. 참 존경스럽지요. 지금까지 부모님께 배우는 것이 많지요."

점심밥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왔습니다. 날이 잔뜩 흐립니다. 비라도 올 모양입니다. 80고령의 두 분을 뵙고 오는 길, 마음이 묵직합니다. 욕심을 부리면 농사도 안 된다는 할머니 말씀이 경구처럼 들립니다. 그게 어디 농사뿐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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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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