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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은 덩샤오핑이 독재자로 변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의 행위는 이미 민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인민의 이익이 아니다. 그가 지금 인민을 속이고 신임을 얻은 후 독재의 길을 실행하고자 하고 있다.

1979년 3월 베이징 시단(西單)의 <민주의 벽>에 ‘민주냐 아니면 새로운 독재냐?’ 라는 제목으로 붙은 격문의 내용이다. 2004년 목하 중국의 정치 분위기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문구다.

중국 현대정치사에서 민주와 자유가 가장 무르익었을 때는 80년대 초가 아닌가 싶다. 우리 나라 '민주화의 봄'처럼 중국도 이 때 언론과 문화계의 자유스러운 백화제방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정치는 국가의 일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며 철저하게 경제적 현실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중국인이 불과 20여 년 전에 그토록 치열하게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민주와 자유의 열정으로 넘쳐났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이는 1980년 2월 총서기, 1986년 6월 주석 겸 총서기로 임명되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진보주의적 정치지도자로 평가받는 후야오방(胡耀邦)의 등장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1987년 급진적 자유주의로 공산당을 분열시키고 위기에 빠뜨린다는 이유로 실각되어 2년 후인 1989년(세계인권선언 40주년,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중국 5·4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수립 40주년, 1979년의 민주운동 북경의 봄 운동 10주년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해였다) 4월 15일 심장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를 추모하는 민중운동이던 6·4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철저한 탄압 속에 실패하면서 중국을 잠시 적시던 민주는 증발하고 다시 암울한 억압과 사상통제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올해 4월 15일은 중국의 전 총서기 후야오방 서거 15주년이었다. 그러나 중국 언론보도 그 어디에도 20년 전 중국 최고의 지도자였던 그와 관련한 기사는 없었다. 이 같은 현실은 중국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통제 받으며 언론·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이 때문에 서방언론은 개혁개방 이전보다 언론상황이 오히려 열악하다고 평가한다.

1976년 1월 8일 서거한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추도하고 급진적 좌경주의 노선을 걸으려는 4인방 세력에 항거한 민중운동이 위대한 민중혁명으로 평가받는 4·5 톈안먼 사건이다. 이때 폭동의 주모자로 몰려 실각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11기 3중 전회를 계기로 복권하여 그의 심복이면서 역시 주자파로 몰려 실각되었던 후야오방을 복권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후야오방을 지명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학생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노장파(덩샤오핑을 포함한)의 퇴진과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후야오방을 덩샤오핑은 더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고 1987년 그를 학생운동 확산의 책임을 물어 파면한다.

그러나 1989년 갑작스런 후야오방의 죽음은 진보적 민주세력의 결집을 가져와 다시 한번 덩샤오핑에게 민주와 개혁에 관한 과제를 던져주게 된다. 후야오방이 죽은 이틀 후인 4월 17일부터 베이징 학생과 시민들의 추모행렬이 49일 동안 계속되며 민주화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바로 6·4 톈안먼 사건의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이다.

학생운동을 평화적인 대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진보적 정치지도자 자오즈양(趙紫陽)이 노장 보수파의 압력에 5월 19일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결국 6월 4일 톈안먼에서는 2000명의 학생과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제1차 톈안먼 사건 때 사건의 주모자로 지명되어 실각되었다가 복권된 덩샤오핑처럼 제2차톈안먼 사건의 주모자로 실각된 쟈오즈양이 다시 복권되었다면 6·4도 4·5처럼 위대한 민중혁명으로 재평가 받았을 것이며 중국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학습효과를 지닌 덩샤오핑은 당내의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세력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학생운동에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며 정치적으로 참신한 쟝저민(江澤民)을 당 총서기로 임명해 그의 뒤를 잇게 한다. 노장 보수세력에게 권력을 인계할 경우 더 큰 민중의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체득한 덩샤오핑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오늘날까지 중국의 정치는 위정자들만의 성역으로 철저히 대중들로부터 멀어졌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돈맛을 안 대다수 중국인들도 배불리 먹게만 해 준다면 독재든 민주든, 자유든 억압이든 상관없다는 논리로 비정치적, 무정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중국의 자본주의가 민주세력을 형성해 어느 시점에서는 다시 민주화 요구를 분출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통해 중국의 민중봉기와 민주세력의 싹은 철저하게 제거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움터 자라 꽃을 피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지금 중국에는 경제성장 단계에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독재가 필요하다며, 중국공산당이 4개 견지(마르크스-레닌 사상, 공산당 영도, 마오쩌둥 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 견지)를 통해 확고하게 정치적 기틀로 마련해 놓은 상황에서 민중 봉기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체제 속에는 분명 정치적 민주화의 논리가 담겨져 있으며 급속한 인터넷의 보급과 WTO 가입 이후 밀물처럼 밀려드는 서구의 자유와 민주의 사상들이 이미 중국인들의 의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급성장하는 민주화 요구는 언젠가 중국지도부에 또 한번 적지 않은 과제들을 던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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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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