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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 : 9일 오후 2시]

성금, 9일 오후 3천만원 돌파


드디어 3천만원.

9일 오후 1시 33분 박대현씨가 3만원을 입금,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 운동 성금이 3천만원을 돌파했다.

이는 지난 11월 27일 모금을 시작한 지 13일 만의 일이며, 오후 2시 현재 총 모금액은 30,050,325원이다.


[감사 후기-5신 : 6일 오후 6시]

권중희 선생 미국행 위해 여권재발급 및 비자 신청
-성금중 일부 사용...금전출납부 만들어 입출금 내역 공개할 것


▲ 독립공원 3.1 기념탑 앞에서 (왼쪽부터 이항증, 권중희, 박도)
어제 한 독자가 게시판으로 권중희 선생님의 미국비자 준비 여부를 문의해 왔다. 권 선생님도 기우삼아 비자 걱정을 하신 바 있었다. 세심한 그 독자분의 배려에 감사드리며 오늘은 주말이라 권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간밤에 약속을 했다.

권 선생님은 평일에는 일터에서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셨다. 당신의 자존심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신지, 또 요즘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시는지 여쭤보지 않았다. 다만 주변분들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시며 산다고 했다.

권 선생님이 기왕이면 이항증 선생도 모시고자 해서 이 선생님께 연락드렸더니 마침 사정이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40일 만에 오늘(12월 6일) 정오에 처음 만났던 독립문 네거리 인근 독립공원 3.1 기념탑 앞에서 다시 만났다.

참고로 이항증 선생은 나에게 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신 분으로, 지난 1999년 여름 2주일 동안 나와 함께 중국 동북3성 일대의 항일유적지를 함께 답사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이시다.

선대에서 독립운동만 하지 않았더라도 안동 유림 명문가로 종가를 지키면서 편히 살았을 분인데 3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관계로 당신은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항일을 하면 3대가 어렵다는 전형적인 집안이다. 외가가 왕산 허위 선생 집안이고, 이육사 시인과도 이종간으로 항일 명문가 출신이다.

이 선생은 이번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데 대해 아직도 겨레의 가슴속에는 민족혼이 살아있어 희망이 있다고 고무하시면서 이번 일이 성공리에 마치려면 무엇보다 권 선생과 동행할 사학도를 잘 만나야한다고 조언하셨다.

더도 덜도 말고 친일파연구에 일생을 바치신 고 임종국 선생 같은 분만 만나면 큰 성과가 있을 거라며, 귀를 크게 열고 그런 분을 수소문해보라고 권했다. 임종국 선생이 친일파들의 행적을 도서관에서 조사할 때는 1960~70년대로 그 때는 복사기도 없었던 시절이라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시고 또 라면을 끓여 잡수시며 발굴했다고 그때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설렁탕으로 점심을 든 후 여권과 비자 신청을 알아보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뒷골목으로 향했다. 여권/비자 대행사에서 알아본 결과 권 선생의 여권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여권을 재발급받은 다음 미국비자를 신청하라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종로구청에 가서 여권 재발급 신청을 했다. 그 새 나는 인근 조흥은행 점포에 들러 통장을 넣었으나 정리는 안 되고 잔액만 확인할 수 있었다. 6일 오후 2시 40분 현재 22,739,025원이 입금돼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독자들이 보내준 성금 일부를 헐어 사용했다. 권중희 선생의 여권 재발급과 비자 신청 비용으로 207,000원을 사용한 것이 그것이다. 조만간 금전출납부를 만들어 출납사항도 성실히 밝힐 방침이다. 성금을 보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린다.


<4신-감사후기2 : 5일 오후 5시>

“박 선생님,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12월5일 낮2시 현재 후원금 1897만원


5일, 나는 아침부터 설렜다.
모금액 1200만원 돌파 하루 뒤인 오늘 아침, 오마이뉴스가 기사를 메인톱 1번으로 올린 데다가 한겨레신문도 오늘자에 권중희 선생 인터뷰를 실었기 때문에 모금액수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점심을 후딱 먹은 후 가까운 은행을 찾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통장을 넣고 기다렸다. ‘띠리릭, 띠리릭~’ 거래내역이 타이핑 되는 소리가 기분좋게 이어졌다. 그러기를 몇분 후, 지급기에서 나온 통장을 보자 입이 벌어졌다. 거래장을 다 채우고 뒷면의 정기예금 면까지 두면이나 침범한 것이다. 아무래도 세 번째 통장을 발급받아야 정확한 모금액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하고 있는 권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 곧장 학교로 와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 5일 오후 오마이뉴스 편집국을 방문한 권중희 선생과 박도씨(오른쪽)가 김구 암살관련 자료를 찾기 위한 미국방문을 위해 모금된 통장을 보여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권 선생은 득달같이 달려왔다. 반가운 소식에 그대로 달려왔다는 권 선생을 보니, 정말 작업모에 점퍼 차림이었다. 권 선생과 나는 다시 은행으로 향했다. 사흘만에 새 통장을 발급해달라고 하자 은행직원조차 놀라워했다.

18,969,025원!
어제 저녁부터 오늘 오후 4시까지 670여만원의 성금이 입금된 것이다.

“박 선생님, 지금 우리가 꿈꾸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권중희 선생은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내게 감사의 악수를 청했다.

‘백범 암살 배후 추적을 위한 모금운동'이라는 9일 동안의 대장정을 거친 지금, 권중희 선생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행은 거의 실현 직전에 다다랐다. 아울러, 한평생 외롭게 싸워왔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이젠 십시일반의 ‘금은보화’를 보태준 천군만마 같은 네티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성금과 독자의견을 보내준 독자들에게 거듭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2월 5일 오후8시40분 현재 모금액은 2125만4025원입니다.)

<3신-12월4일>
지하의 백범 선생이 등을 두드려준 듯
<감사후기> 4일 현재 모금액 1216만6천원


▲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 모금액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최근 내 일과 중 이전과 다른 하나는 하루에 두 차례씩(점심시간과 퇴근시간) 학교에서 가까운 조흥은행에 들러 통장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3일은 마침 후배교사요, 같은 시민기자인 윤근혁 선생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귀가 길에 같이 통장확인을 했다. 통장을 넣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950만원만 돌파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통장이 기계안으로 들어간 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통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렸다. 다소 긴 시간이라 예상보다 많은 후원금이 들어왔겠다 싶었다.

10,066,025원!!!

나는 순간 곁에 있던 윤 선생을 껴안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목이 멨다.

오마이뉴스에 8차례에 걸쳐 권중희 선생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몇몇 네티즌들이 모금운동을 주선해 보라고 할 때 사실 많이 망설였다.

과연 성금 모금에 성공할 수 있을까? 네티즌들 가운데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까? 목표액이 미달하면 그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 선생이 학생이나 잘 가르치지, 네가 뭔데 이런 일까지 나서냐’고 욕이나 먹지 않을까? 등등.

관련
기사
"내 평생 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 (1)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일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생전 통장 하나 없이 살아온 권 선생을 설득해 통장을 만들도록 부탁한 뒤 11월27일, <취재후기>를 빌어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과 후원금 계좌번호를 넣은 기사를 올렸다.

기사를 올리면서도 조마조마한 마음을 없앨 수 없었던 내 마음은 바로 다음날부터 감동에 의한 설렘과 떨림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건 권중희 선생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기사 게재 다음날인 11월28일, 권 선생은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통장정리를 했더니 2,494,000원이나 입금됐다고 감격해했다.

그렇게 시작된 후원금 모금이 6일만에 1000만원을 돌파했다. 당초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목표액의 절반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우리 겨레의 가슴 속에 잦아진 민족혼이 되살아난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분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중희 선생 미국보내기'
후원금을 보내시려면...

조흥은행 579 - 04 - 410340
(예금주 : 권중희)
12월4일 현재 후원금 모금액은 1216만6천원이다.

후원금이 늘어나는 만큼 지지 및 격려 독자의견과 쪽지도 쌓여간다. 독자의견과 쪽지는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을 빛내주는 큰 힘이 된다.

태평양 너머의 송아무개씨는 “한 6-7년전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단체에서 권중희 선생님을 모셔서 뵌 적이 있습니다”며 “권중희 선생님의 소원이자 민족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돕고 싶습니다”라며 ‘독립자금’을 보내왔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이제 고지가 가물가물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더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늘이 도와주고 사람이 도와주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지하에 계신 백범 선생이 어깨를 두드려주신 듯하다. 용기백배해서 또 기사를 쓰고 다른 매체에도 홍보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한다.

<2신-12월2일>
권중희 선생의 꿈★은 이뤄진다
2일 현재 후원금 815만6천원



▲ 백범 김구 묘소에서의 권중희 선생.
ⓒ 박도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한평생을 ‘백범 김구’ 암살 배후 추적에 바친 권중희 선생에 대한 독자들의 지지와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백범 김구 암살 진상규명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고 싶다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권중희 선생의 꿈은 차츰차츰 ‘현실화’되고 있다.

11월28일, 권 선생의 사연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된 뒤 수십명의 독자들이 1인당 적게는 1만원부터 많게는 100만원까지 후원금을 보내와 12월2일 오후6시 현재 815만6천원을 기록했다.

또 독자의견 란에는 70여개의 후원 및 지지 의견이 올라왔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민족반역자에게는 시효가 없다. 반드시 반드시 매듭을 져야한다.”-세방울(lovebackho)

"권중희, 박기서 이런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혁명가다. 왜냐면 이 분들은 정의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며, 악은 언젠가 반드시 응징 당한다는, 소박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원칙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수호하려는 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이 분들은 그러한 세상의 부조리와 운명에 맞서 인간의 선함과 의지를 반드시 관철하고 증명하려는 분이다. 그래서 이 분들은 위대하다." -아침(eumatae)


미국 현지교포들은 ‘쪽지보내기’를 통해 구체적인 도움방안들을 제안해왔다.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제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북버지니아에 살고 있으니 도움을 주겠다”고 알려왔으며, 뉴저지에 사는 김아무개씨는 이동시 숙소와 식사를 해결해 주겠다며 개인연락처를 보내왔다.

또 임아무개씨는 자신의 항공사 마일리지로 권 선생의 비행기표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신아무개씨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돈은 없지만 통역가이드 등 몸으로 봉사하겠다”고 요청했다. 워싱턴 버지니아 학생인 권아무개씨는 “지역 학생들과 연결하면 통역과 체류비 등이 절약된다”며 도움을 약속했다.

촛불 하나가 광화문과 시청 앞을 밝혔듯이, 이 촛불의 불씨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권중희 선생의 소원, 이것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함께 풀어야할 과제다.


<1신 - 11월27일>
'안두희 응징'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의를 좇는 사람 (2)-취재후기] 진상규명,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 발의 총성으로 허물어진 민족정기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운명했다. 그 총소리와 함께 민족정기도 허물어져 버렸다.

범인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 그는 달려드는 비서들과 경비순경들에게 여유 있는 태도로 “선생은 내가 죽였다”며 권총을 든 채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안두희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암살범 안두희는 줄곧 단독 우발 범행을 주장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했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 안두희를 폭행한 죄로 수감생활을 했던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권중희 씨
ⓒ 박도
권중희. 1936년 경북 안동 태생으로 안동 경덕중학교 재학시절 <백범일지>를 수차례 읽고 김구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어른들로부터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는데, 정작 그 범인은 활개치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의분이 하늘에 치솟았다.

서울로 와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중 안두희가 몰래 미국으로 이민가려 한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그때부터 생업도 팽개치고 백범 선생의 암살 배후를 밝히고 그를 응징하고자 추적 길에 나섰다.

권중희 선생은 마침내 1987년 3월 27일 서울 마포구청 앞 대로에서 몽둥이로 안두희를 응징하다가 폭행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35일만에 출소)을 받았고, 1991년 그리고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으로 데려가 범행 일부를 자백받았다. 권중희 선생은 이 일로 다시 폭력행위 위반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6개월 처벌을 받고 70일만에 풀려났다.

백범 김구 암살 진상규명,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범 선생이 돌아가신 지 54년이 지났다. 안두희가 박기서씨에게 몽둥이로 맞아죽은 지도 7년이 지났다. 안두희 입에서 쏟아져 나온 암살 지령 지휘 계통에 있었던 사람도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 암살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권중희 선생은 아직도 암살배후 진상 규명에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권 선생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어디엔가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비밀문서에서 김구, 안두희라는 이름이 나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동행해 미국에 가서 그 비밀문서를 속시원하게 파헤쳐 보는 것이다.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해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다.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필자는 지난 10월 27일부터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12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을 취재한 후 <오마이뉴스>에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기사를 8회에 걸쳐 썼다.

"권중희 선생님을 미국으로 보냅시다"
독자의견에 쏟아진 지지와 후원

권중희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자
우리의 역사가 치욕스러운 것은
우리가 30여 년간 일제의 압박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치욕의 역사 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범법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조국
나는 그런 조국을 원하지 않는다.

권중희 선생을 위해
그가 우리의 치욕스런 역사를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치욕스런 역사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조성준(독자의견에 올려주신 글입니다.)


생업도 팽개친 채 12년간이나 이어온 권중희 선생의 끈질긴 추적에 담긴 의로움 때문이었는지 많은 독자들이 권 선생에게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독야청청'이라는 아이디의 독자는 “권중희 선생 마지막 소원인 미국 보내드리는 여비 모금 운동을 전개하라"고 했고, '아줌마'라는 아이디의 독자는 ”희망돼지 성금을 만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권중희 선생을 위한 모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권중희 선생에게 이런 생각을 밝히고 계좌번호를 물었더니 권 선생은 극구 사양했다. 혹시나 돈 문제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여태 당신 이름으로 된 통장 한 개 조차 없는 상태였다. 나는 권 선생에게 수차례 권고한 뒤에야 권 선생이 통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50여 년이 지나도록 속 시원히 밝혀지지 못한 독립지도자 김구 선생 암살 배후. 권중희 선생의 암살배후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사람은 아래의 계좌번호로 후원하면 된다.

조흥은행 579 - 04 - 410340 (예금주 : 권중희)
(기부자는 박도의 <의를 좇는 사람> 게시판을 통해 공개할 예정입니다. 익명기부를 요청하실 분은 '쪽지보내기'를 통해 알려주시면 됩니다.)
솔직히 나는 권중희 선생의 함자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만나뵌 적이 없었다. 외국에 있는 한 독자 분께서 권중희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다면서 취재를 부탁했고, 마침 중국 항일유적지 답사때 만나 형님처럼 모시는 이항증 선생과 권 선생이 동향이어서 어렵지 않게 만남이 이뤄졌다.

올해 춘추가 68세라는 권 선생은 네댓 시간의 대담 내내 꼿꼿한 자세로 논리 정연하게 말씀하셨는데 특히 비상한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권 선생은 해방 후 현대사를 꿰뚫다시피 했으며 특히 안두희의 전력, 그리고 백범 암살 사건에 관련된 인물의 신상명세는 줄줄 욀 정도였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의를 좇는 분들을 취재하다 보면 한결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분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권 선생도 곤궁해 보였다. 하지만 권 선생은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당당했다.

나라가 할 일을 대신해 안두희를 응징했던 권중희 선생에게 나라는 치하나 훈장은커녕 쇠고랑을 채웠다. 국민마저 그런 분들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의인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범 김구 암살 배후를 밝히고자 하는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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