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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고 했다. 군자와 소인을 잘 대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의를 좇는 사람보다 이로움을 좇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아니 의를 좇는 사람은 눈을 닦고 찾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의를 좇는 이를 보면 그를 격려하거나 본받으려 하지 않고, "저 사람은 어디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 아니냐?"는 취급을 하거나, "잘 해 보세요. 얼마 가나", "저 혼자 잘난 체 하네", "삐딱한 친구야", "모난 사람" 따위의 말로 빈정대거나 야유하는 세태다.

그 반면에 이익이 되는 일에는 뭐 무더기에 쇠파리 떼 끓듯 우글거린다.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시비선악도 가리지 않고 마치 불나비가 불 보고 뛰어드는 꼴과 똑같다. 연일 무슨무슨 자금으로 신문을 도배질하는 정계, 그러고도 의정단상에 서면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고 나라와 겨레 사랑은 자기들만의 전유물이다. 정치계만 그런게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 그렇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이런 세태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은 이 시대의 의인이요, 집념의 분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일에 의분을 느껴도 일회성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권중희씨는 감옥행도 마다않고 생업도 팽개치고 10여 년 오로지 암살 배후 밝히는 일에 매달린 그 분은 일제시대에 독립전사와 같다.

"외로워요."
대담 간간이 권중희 선생은 나에게 외롭다고 했다.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당신이 뭔데 그런 일에 나서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아직도 현실의 벽이 너무 두텁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 1992. 2. 28. 백범 선생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암살범 안두희, 그러나 그는 진정한 참회는 하지 않고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긴 채 끝내 박기서 씨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 권중희
끈질긴 추적

나는 2차 응징 실패 후 굳게 닫힌 안두희의 철옹성 같은 입을 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반응이 없어도 계속 정치권에 진정서를 보낸다든지, 벽창호 안두희의 양심에 호소하는 편지도 보낸다든지, 안두희 집을 찾아서 좋은 말로 호소도 여러 번해 보았다.

그러나 정치권은 냉담했고, 안두희도 여전히 완강했다. 안두희는 암살에 관해서만은 자기 단독으로 했으며, 순간적인 우발이었다고 우기고 단지 서북청년단(서청) 시절부터 미국 정보기관 사람들과 자주 만났다는 사실만 이야기했다.

1992년 2월 28일에는 정용호, 김석용 동지와 같이 갔다. 나는 안두희와 전생에 무슨 악연인지 10여 년 서로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되니, 그 즈음에는 한밤중에 가지 않고 대낮에 이웃집에 놀러가듯이 안두희 집을 찾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날 나는 동지들과 안두희를 얼러서 백범 묘소에 데리고 갔다. 나는 안두희가 백범 묘소에 가면 그 분위기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기대했다.

백범 묘소에 이르자 안두희가 쇼를 하는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라기보다 초라해져 버린 자신의 신세에 대한 원통함의 눈물이었다.

그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면 입을 열어 진상을 다 털어놓았을 것이다. 묘소를 다녀오고도 계속 입을 다물어 나는 자백을 받아내는 길은 하나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에는 사생결단의 거사를 기획했다.

의외로 죽음을 두려워 한 안두희

디데이를 1992년 4월 12일로 잡았다. 육철회, 원궁재 동지와 안두희의 처를 전화로 구슬려 그날 낮 11시 무렵 안두희 집으로 갔다. 밧줄과 몽둥이는 가방 속에 숨긴 채 안두희와 마주쳤다. 그때 안두희는 중풍을 앓고 있었다.

나는 안두희에게 “이미 심증으로는 다 아는 일인데 혼자 십자가를 지고 불안에 떨며 살아갈 필요가 뭐 있느냐, 네가 진상을 죄다 털어놓기만 하면 내가 나서서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르쇠로 입을 열지 않았다.

간곡한 설득에도 안두희는 듣지 않고 "나가라우! 나가라우!"라고 고함만 질렀다. 나중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꼬박 두 시간을 설득했으나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요지부동이었다.

별 수 없이 젊은 동지들과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가지고 간 밧줄로 안두희를 꽁꽁 묶어버렸다. 그런 후 나는 안두희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좋다! 너를 죽여주겠다. 너를 살려둔 것은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진실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다. 달래도 보고 때려도 보고 협박도 해 보았다. 백범 선생 묘소에 무릎을 꿇려도 봤다. 그래도 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마지막 기회를 줘도 너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살려둘 수 없다.

이제 너는 저승에 가고 나는 형무소로 가게 되겠지만, 너를 죽인 나는 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겠지만 저승에 간 너는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번에 죽이지 않겠다. 오늘부터 네 집에서 문을 잠그고 농성하면서 몇 년 몇 달이고 시들시들 말라 죽이는,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이겠다"고 한 다음 몽둥이로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 백범 묘소 앞에서 암살 배후를 밝히는데 신명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권중희 씨
ⓒ 박도
안두희, 마침내 입을 열다

결박당해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계속 악을 썼다. 그래서 나는 정말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몇 차례 더 갈겼다. 드디어 안두희의 입이 열렸다.

안두희는 백범 선생 암살 거사 전에 김창룡과 조선호텔 앞에 있는 '대륙상사'라고 위장한 육군 특무대에서 주로 만났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백범은 단정 수립을 반대하는 등 대한민국에 해를 끼칠 사람이므로 제거해야 한다. 백범은 큰나무로써 수많은 빨갱이들이 그 밑에 숨어있다. 빨갱이를 일일이 잡아서 말살할 수는 없으나 큰나무를 쓰러뜨리면 그 아래 숨어 있는 빨갱이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된다"는 요지를 말하면서, 그가 직접 암살 지령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김창룡의 세도와 위치를 생각하면 그런 암시는 지령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날 안두희의 자백을 요약하면 김창룡과 장택상, 노덕술, 최운하 같은 사람의 '지령이나 다름없는 암시'를 받고 미 정보기관의 중령의 주장에도 깊이 공감하여 '이심전심'으로 저 혼자 암살을 결행했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나의 집요한 추궁에 굴복하여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진상의 핵심은 요리조리 피했다. 하지만 철옹성 같던 그의 입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게 중요하다. 아무리 교활한 그도 언젠가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든지, 제 풀에 지쳐서 사실을 토로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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