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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선생은 1936년 생으로 올해 67세다. 그런데도 아직 청년 못지않은 체력과 기백, 그리고 조국과 겨레에 대한 애국심이 활활 타고 있었다. 일제시대라면 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의사처럼 되었을 분 같았다. 대담 중, 눈길이 마주 치면 아주 매서웠다.

정말 안두희가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고 생각이 들었다. 암살범 안두희로서는 권중희 선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저승사자로 비쳤을 게다. 권·중·희 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부들부들 떨었을 게다. 안두희는 일제 고문 원조 노덕술보다 빨갱이 잡던 김창룡보다 권중희가 더 무서웠을 게다. 안두희를 겨레의 이름으로 처단한 이는 박기서씨이지만 그분도 권중희 선생의 의거에 감화를 받아서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전한다.

이런 귀빈을 내 집에 모셨지만 아내가 시골에 갔기에 제대로 대접할 수 없었다. 마침 포도주 담은 게 남아 있어서 북어포에다 고추장을 꺼내 이항증 선생과 함께 셋이서 건배 후 다시 다음 얘기를 들었다.

실패로 끝난 2차 응징

▲ 2차 응징에 가담한 노송구(좌) 씨와 권중희(우) 씨
ⓒ 권중희
나는 안두희를 응징하겠다고 찾아온 29세의 노송구씨의 갸륵한 뜻에 감복하여 2차 응징에 나서기로 했다. 나는 노씨에게 그 사이 둔촌동으로 이사한 안두희 집을 사전 답사케 하고, 안두희에게 위압감을 주고자 군복까지 사서 입히고 1차 응징 때 준비한 ‘정의봉(박달나무 몽둥이)’까지 줬다.

내가 단식으로 기력이 없어서 노씨가 안두희 집에 침투해 안두희를 결박한 후 곧장 나에게 연락하면 즉시 녹음기를 들고 달려가 백범 선생 암살 배후 진상을 자백받기로 미리 약속했다. 나는 순박한 노씨가 침투에 성공한다 해도 구렁이나 여우처럼 교활하고 노회한 안두희에게 회유될 것 같은 예감으로 절대 값싼 동정이나 어설픈 자비로 대의를 그르치지 말라고 노씨에게 신신 당부했다.

1987년 7월 20일 밤 12시를 결행 시간으로 결정하고 나도 그 날부터 단식을 풀었다. 그 날 밤, 초조하게 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12시 무렵 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날씨가 무더워서인지 사람들이 바깥에 많이 나돌아서 침투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그를 불러 다음날 새벽 1시로 결행 시간을 미뤘다.

다음 날 새벽 조마조마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 3시 무렵에야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기자들 좀 불러 주세요.”

나는 상황이 궁금해서 계획대로 잘 되었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몇 몇 신문사와 방송국에 알렸더니 안두희 집을 모른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아무개 신문사 차를 타고 둔촌동으로 달려갔다. 내가 예측한 대로 침투는 성공했지만 안두희를 결박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씨 말에 따르면, 1시 무렵 안두희 집에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담요를 덮고 자는 안두희에게 플래시를 비추면서 발길로 찼다.

“야 이 역적 놈아! 일어나!”라고 소리치자 안이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 모든 걸 다 얘기할 테니 제발 좀 앉으라고 싹싹 빌더라고 했다. 그 말에 노씨가 앉으니까 안두희가 그대로 자기 고향 주특기인 평안도 박치기로 공격해 왔다.

노씨는 얼떨결에 그만 몽둥이를 빼앗겼다. 정신이 뻔쩍 든 노씨는 기지를 발휘해 “쏜다! 손들어!” 하면서 마치 권총이라도 가진 듯 위협하니까 안두희가 손을 들었다. 노씨는 안에게 달려들어 몽둥이를 뺏은 후 후려갈겼다.

그러는 사이 안두희의 처 김 아무개가 노씨의 발목을 꽉 붙잡고 “불이야!”라고 소리쳐 동네사람들이 불이 난 줄 알고 뛰쳐나와서 신고하는 바람에 방범대원, 경비원, 경찰이 달려와서 노씨는 연행됐다고 했다.

노씨는 그 사건으로 두 달 남짓 교도소 신세를 졌다. 나 때문에 젊은 사람이 생고생한 것 같아서 두고두고 노씨에게 미안했다. 그 사건 후 곧 안두희는 인천 신흥동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버렸다.

외면하는 정부 각 부처와 정치권

나는 보다 근원적으로 백범 암살 진상을 규명하고자 사회 여론에 호소함과 아울러 정치인들에게 기대해 보았다. 한독당 동지회를 중심으로 대학로와 탑골공원, 그리고 남산공원 등지에서 백범 암살 규명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였다.

몇몇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서명 운동을 거들어 주었다. 하루 종일 수고한 그들에게 라면 한 그릇 사 주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한독당 동지회만 고군분투했다.

마땅히 동참해야 할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유공단체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없었고, 여야 정치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탑골 공원에서 서명을 받는데 괴청년들이 나타나서 "이미 지난 걸 가지고 뭘 소란을 피우느냐"고 서명대를 뒤집기도 했다. 파출소에 가서 그 괴청년들을 막아달라고 하면 '원래 이곳은 그런 곳'이라고 오히려 그들을 두둔했다. 다만 지나가는 시민 중에는 빵과 음료수를 사다 주고 지갑을 털어주는 분도 더러 있었다.

서명자가 2만 명을 넘어서 그걸 가지고 국회에 제출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1989년 1월에는 13대 국회의원 개개인에게 국회 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할 것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회신을 보내온 의원은 단 한 사람뿐으로, 독립운동가 후손 이 아무개 의원뿐이었다.

나는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촉구하고자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요,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에게 진정서를 내용증명으로 발송했다.

▲ 3. 1 기념탑 앞에서 권중희 씨
ⓒ 박도
얼마 후 회신이 왔다. 청와대에서는 국방부 소관이라고 생각된다며 국방부로 이첩했다고 했고, 국방부에서는 법무부 소관이라고 그곳으로 이첩했다고 했다. 법무부에서는 검찰총장으로 하여금 처리하고 그 결과를 통보하겠다는 회신을 보내오고서는 이제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마치 배구볼이 날아오면 튀기듯이 다른 부처로 미루거나 묵살해 버렸다. 나는 또다시 철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린 어리석음을 새삼 확인했을 뿐이다. 만일 이권이라면 서로 자기네가 맡겠다고 코피 터지게 싸웠을 것이다. 이런 정부에 세금 내고 사는 백성이 정말 불쌍했다.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법통을 잇는다'라고 해놓고는 임시정부 주석의 암살에 대해 그 진상조차 밝히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지하에 계신 백범 선생의 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말 이 나라가 "왜놈들에게 해방된 나라냐"고 백범 선생이 울부짖는 듯했다. "헌번 전문을 당장 뜯어고치라"고 일갈(一喝)하신 것 같았다.

전두환, 노태우 그들은 자기들 집단을 ‘민주정의당’이라고 했다. '정의’라는 낱말의 뜻을 모독하고 훼손한 자다. 나중에서야 그 자들의 진면목을 알았지만 그들은 마적보다 더 나쁜 자들이다.

마적도 의협심이 있어서 때로는 의적이 되기도 하는 데, 그 자들은 청와대 영빈관에다 기업주들을 불러다가 돈이나 뜯었던 도둑들로서 대통령 직을 한낱 자기네 가문의 영광이나. 딸 아들 시집 장가 잘 보내는 데로 이용한 국정문란범들로, 만주국의 푸의나 이란의 팔레비와 같은 자들이다(이에 필자가 좀 심한 비유라고 하자, 오히려 권중희 선생은 푸의는 왜놈의 꼭두각시 노릇은 해도 제 동족에게 총은 쏘지 않았고, 돈을 사과궤짝에다 감출 만큼 더러운 축재는 하지 않았으며, 10여 년 징역을 산 후 참회하고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나라가, 정치인들이 독립운동가의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에 외면한다면 '민족정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나 같은 필부가 안두희에게 사형(私刑)을 가해서라도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다시 실정법에 저촉되는 범법자가 되더라도 안두희를 납치하여 그 배후를 밝히기로 다짐하고 함께 거사할 동지 규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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