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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옥문 앞에서 권중희 씨
ⓒ 박도
역사의 현장

권중희, 이항증 두 분과 만날 장소로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정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 역과 가깝고, 또한 권 선생은 일산, 이 선생은 역삼동이라 중간 지점인데다가 필자의 학교와도 가까운 곳이라 안성맞춤일 듯했다. 약속 시간에 장소로 가자 두 분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권 선생은 나에게 약속 장소를 참 잘 정했다면서, 이곳은 일제 때 숱한 애국지사가 이 공원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던 역사의 현장이요, 당신도 안두희를 1차 응징한 후 이곳 형무소에 한달 여 수감된 바 있었다면서, 옥문을 드나들며 그때를 회상했다.

거기서 세 사람이 그 날 일정을 잡은 바, 장소를 옮겨 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운명하신 현장 경교장을 둘러보고, 다음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선생 묘소를 참배한 후 점심을 들면서 대담키로 했다.

서울 시내 변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서대문 경교장 일대도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우후 죽순처럼 솟은 빌딩 숲에도 다행히 적십자병원과 경교장은 옛 모습이 남았는데, 경교장은 지금은 강북 삼성병원 본관으로 개조되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 강북 삼성병원 본관으로 변한 경교장
ⓒ 박도
거기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병원 안내인이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다. '역사의 현장을, 그것도 중요 군사시설도 아닌데 못 찍게 하다니….' 그에게 항의했으나 자기는 시킨 대로 할 뿐이라고 해서 그가 일러준 대로 홍보과로 가서 담당자에게 신분과 목적을 말하자 그제야 촬영 허락이 떨어졌다.

명승지나 역사 현장 답사를 다니면 걸핏하면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별 것 아닌 것도 야단법석을 떤다. 아직도 냉전시대에 산 기분이다.

유신 시절에는 청와대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고, 대통령이 지나가는 날이면 교실 유리창문도 못 열게 했다. 정작 대통령을 향한 총알은 가장 측근에서 날아왔는데도 경호실장은 몸으로 막지도 못한 채 유신의 조종을 울렸다. 경호를 핑계로 온통 인의 장막을 쳐놓고는 주지육림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두 사람 다 천박하게 죽었다. 나라 안보도, 정권 안보도 백성의 마음에서 우러나게 해야 한다. 민심은 떠났는데 철조망만 친다고 정권이 유지되나.

경교장 옆에도 밖으로 천을 가린 채 한창 무슨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머지않아 경교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르겠다. 이나마 보존돼 있는 걸 병원 측에 감사드려야 할까?

거기서 택시를 타고 효창공원으로 갔다. 효창운동장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백범 묘소는 따사한 가을볕에 고즈넉했다. 권 선생은 당신이 이곳으로 안두희를 데려와 무릎 꿇게 한 그때를 얘기했다.

그때 안두희는 백범 묘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참회한 듯하더니 기자 회견장에서는 돌변,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자백이었다고 뒤집는 교활한 자였다면서 끝내 참회하지 않고 박기서씨의 몽둥이에 맞아죽은, 조금의 동정 여지가 없는, 정말 ‘독종 암살자’라고 했다.

▲ 백범 묘소 참배 후 권중희(왼쪽), 이항증(오른쪽) 씨
ⓒ 박도
묘소에 이르자 권 선생은 한참동안 엎드려 무슨 말씀을 드렸다.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드렸느냐고 물었더니, "만고 역적 안두희 그 놈의 입을 열어서 시원한 진상도 밝히지도 못하고 괜스레 세상만 떠들썩하게 했습니다”라고 사죄했다고 했다.

묘소 참배를 마치자 그새 점심시간을 넘겼다. 공원에서 가까운 설렁탕 집에 가서 요기를 하면서 대담을 하고자 했으나 장소가 여의치 못했다. 손님이 줄을 이었고, 실내가 소란했다. 어찌 10여 년 안두희 추적 얘기를 어수선한 밥집에서 듣겠는가! 조용한 곳을 생각다 못해 마침 아무도 없는 내 집으로 모셨다.

안두희 추적 10년 대장정

내 집 거실에서 권 선생의 안두희 추적 10년사를 토로했다. 007 영화보다 더 스릴이 넘쳤다. 10년 역사를 어찌 짧은 글로 쓸 수 있으랴. 장편소설을 써도 몇 권은 쓸 수 있는 얘기였다. 아래는 그 요지만 옮긴 것이다.

독립운동의 화신이며 구국의 상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시던 백범 김구 선생을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동족이 살해하다니….

그 살해범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3개월 후인 그해 11월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마침내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곧이어 7월 10일 국방부 특명 4호에 의해 육군소위로 복귀하였으며, 육군 특무대 문관 및 포병교육대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951년 2월 15일자로 육군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6호에 의해 형 면제조치를 받았다.

살인범 안두희는 1951년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고, 그 후 1956년까지 서울 명동에서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그 뒤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소득세를 많이 내는 부자가 되었다.

예사 사람도 살인을 하면 사형 아니면 무기로 중형을 받는 게 법치국가의 법일 텐데, 겨레의 지도자를 죽인 자가 버젓이 활개치고 사는 세상이 어디 바른 세상인가! 어찌 이런 나라에 도의가 있을까. 이런 나라를 위해 누가 목숨을 바칠까.

어릴 때부터 백범 선생을 흠모했던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비분강개하여 청와대에다가 두 번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안두희를 처단하라는 청원서를 냈다. 그때마다 청와대 비서실장의 답신은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할 수 없다는 회신이었다.

▲ 안두희 추적 10년 세월의 대장정을 들려주는 권중희 씨
ⓒ 박도
두 번째 답신을 받은 날, 나는 언젠가는 안두희로부터 범행 배후 일체를 낱낱이 밝혀낸 뒤 준엄하게 응징한 후 나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달게 받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중 1981년 12월에 안두희가 가족들을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보낸 다음, 자기도 이민 가기 위해 여권 발급을 받았다는데 독립유공단체들이 법무부와 미대사관에 항의하여 출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때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 생활을 핑계로 안두희 납치 거사 날을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끝내 그 놈을 놓쳐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생활에 쫓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일제 때 독립군들은 처자식은 물론 부모까지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았던가!

'안두희 그 놈을 내 손으로 잡아다가 베일에 가린 암살의 진상을 만천하에 시원하게 알린 후 그 놈을 백범 묘소로 데리고 가서 무릎 꿇어 사죄케 하자'고 결심한 후 1982년 정초부터 본격적으로 안두희 추적의 대장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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