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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환기해 보기 위해 '쌀사랑 릴레이기고'를 주1회 선보이고 있다. 그 첫회로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글을 보내왔고, 김씨는 다음 필자로 영부인 권양숙 여사를 지목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아세안+3 회의일정 등으로 권여사의 글을 받지는 못했다. 대신 그 바통을 배농사를 짓고 있는 이재문(여, 57,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거주)씨가 받았고, 배씨는 다음 필자로 농림부 장관 부인을 지목했다. 필자들에게는 원고료 대신 20kg짜리 우리쌀이 전달된다.... 편집자 주


칠월의 햇빛이 배나무 밭의 풀을 태웠다. 숲에서 뿜어대는 훈기는 농부를 숨막히게 했다. 가끔씩 산모퉁이 능선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땀에 절은 농부의 어깨를 시원스럽게 쓸었다.

농부는 배나무 밭에 허리까지 웃자란 풀을 베었다. 앵앵거리는 기계소리와 돌에 부딪치는 풀칼의 굉음에 깜짝깜짝 놀랐다. 숲을 후비며 돌무덤 위를 혀로 핥듯 넘나드는 풀칼을 위험스레 바라보면서 까치와의 일전을 생각했다.

이른 봄부터 복숭아밭 풀베기, 가지치기, 금비 퇴비주기, 살충제농약살포, 솎아내기, 봉지 씌우기 등 작업으로 하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복숭아가 탐스럽게 커서 맛이 들 때쯤에 까치 떼들의 비행공격이 시작되었다. 크고 예쁜 것들부터 쪼아대다가 나중에는 몽땅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땀 흘려 풀을 베었지만 배 역시 맛이 들면 까치들의 육탄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배 봉지까지 씌워 놓았는데 올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매년 똑 같이 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배나무 밭에다 큰소리 나는 기구를 설치할까. 망을 덮어씌울까. 아니면 까치를 몇 마리 잡아 높은 장대에 매달아 둘까. 아니다 그들을 죽여야 했다. 한 마리도 남겨두지 말고 일망타진해야 했다. 총으로 쏴서 없앨까.

제주도 농부가 까치 잡는 큰 덫을 만들어 특허출원 받았다는데 그렇게 하면 안성맞춤이렷다. 또 무슨 방법을 써볼까. 살상 약을 모이에 타서 뿌려 놓는 것은 어떨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깜짝 놀랐다. 풀 베는 예초기 엔진을 끄고 소나무 밑에 앉아 생각을 했다. 까치들이 나의 생각을 미리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까치들이 대책회의를 하여 과수원에다 집까지 짓고 새끼들을 낳아 기르면서 약을 더 올리지 않을까.

왜 이렇게 사람이 변했을까. 과수원의 수지 타산을 위해 저들을 죽여야 하다니. 그렇다면 저들이라고 항변할 것이 없단 말인가. 언제부터 까치와 내가 천적이 되었는가.

옛날에는 아침에 까치가 집 근처에서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까치를 귀하게 여겼다. 어쩌다 마당 가운데 앉으면 모이도 주었다. 그런데 이제 농부는 그들을 미워한다. 미워하니까 까치도 미운 짓만 하는 것이다.

생존권은 자연과 인간에게 똑같이 배분되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모든 농산물은 대량생산체제로 전환되었다. 쉽게 농사를 짓고 많은 생산을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논밭에는 독한 제초제를 살포하여 풀을 죽이고. 고성능 분무기와 항공기로 고단위 살충제를 살포하여 산야에 서식하는 해충뿐 아니라 이로운 벌레와 곤충마저 멸종시킨다. 이것은 먹이사슬의 연결고리를 끊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까치는 하루 먹이만 구하는데 나는 냉장고뿐만 아니라 냉동실, 큰 창고에 1년 아니면 평생 먹을 것을 챙겨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도 까치의 처지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내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닐까.

까치들에게 협상을 제의하면 받아줄까. 이곳 농장에서 서로 공생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 냈다. 잡초를 죽일 때 제초제를 살포하지 말고 지렁이 등이 살 수 있도록 풀을 베어 땅에 깔아 놓을 것. 복숭아밭과 배나무 밭에 곤충들이 서식 할 수 있도록 일 년에 두 번 이상 살충제를 뿌리지 말 것. 과일 나무에 퇴비를 많이 사용 할 것. 과일밭에 평화유지군인 진돗개를 배치하지 말 것. 까치들과 자연의 몫으로 수확한 것의 10분의 1을 줄 것 등이다.

나 자신부터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배나무 중에서 제일 큰 것 여섯 주와 다른 과실수 여섯 주는 종이 봉지를 씌우지 않기로 했다. 과일밭에 방사하여 사육하는 오리들의 먹이를 줄 때 까치들의 먹이도 따로 충분히 주었다.

까치들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종이로 싸놓은 배는 쪼아대지 않고 자기들 나무로 지정된 과일만 먹었다. 그들은 오리들과 같이 다정하게 사료를 쪼아 먹었다. 내가 까치 옆에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저들과 농부 사이는 평화가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스로 강자라고 하는 자가 먼저 약자인 까치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들의 몫을 되돌려 주었던 결과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급급하여 감정대로 까치들과 싸움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농장에는 평화롭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산에서 새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인간에게 배반당한 자연은 언제가 크게 보복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까치와의 전쟁을 선포하려고 했던 나는 어느 날 선뜻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 자비심을 넘어선 생존권이 양자에게 똑같이 있다는 판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약간의 사료와 과실을 포기함으로서 까작까작 마음껏 우는 새들의 합창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농장의 한 식구로 맞이한 까치들 때문에 농부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쁨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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