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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로 너희 할머니께서 치매 진단을 받으시고 부모님과 함께 사신 지 꼭 1년이 되는구나. 그동안 네가 매일 할머니 때문에 힘들어하며, 수업 시간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동기들에게도 자주 짜증을 낸다는 이야기를 내 친구들에게 듣고서도 너에게 전화조차 한 통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형, 오늘 시간 있으세요? 저 술 좀 사주세요"라며 나를 붙잡았을 때도 네가 왜 그러는 줄 알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너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가장 절친한 사이라고 후배들이 말한 나조차 너의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격려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 할 일이 바빠서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 때문에 너를 포함한 온 가족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에게 입을 다물었던 것은, 내 기억 속에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거리에서 넘어지셔서 다리가 부러진 내 할머니는, 그 후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셨다.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화장실 수발을 드시면서 극진하게 간호하셨지만 1992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일 창 밖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던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 조금씩 이상해져 갔다.

마땅히 당신의 옆에 놓인 변기통에 보셔야 할 일을 방바닥에 보시고는 그것을 벽에 문지르시거나, 다른 곳에 넣어두기도 했다. 때로는 할머니의 가방 속에서 때로는 화분 한쪽 구석에서 발견되는 변 냄새에, 집에 들어서면 신문지 태운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움직이기도 힘드신 상태에서도 끼니마다 드시는 양은 오히려 늘어나서 신문지를 태우지 않고는 도저히 그 악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만두를 유난히 찾으시는 할머니에게 만두를 사다 드리자, 한시간만에 소화되지도 않은 만두가 변에 섞여 나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고, 나를 포함한 누나들도 학교에 다니던 그때 할머니의 모든 뒷바라지는 내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엄마이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거듭되는 할머니의 병 수발과 집안 일에 어머니는 지쳐만 가셨다.

더욱이 할머니가 병을 얻으시자 8남매나 되는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며칠간 할머니를 모시겠다"는 말 한마디 없고 "당연히 맏이가 모셔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해 우리 집은 다툼이 끊일 날이 없었지.

나는 할머니 때문에 온 식구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도서관에 있는 날이 많았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꾸중과 어머니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신문지 태우는 냄새와, 다투는 소리,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늦게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셨고, 할머니가 주무시는 순간만은 집안이 평화로웠기 대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행동을 생각하면 모두에게 죄송스럽다. 물론 그때의 정황이 그리 편안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내 모든 방황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서 출발했다. 그저 현실이 싫기만 했지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힘들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식구들 간에 좀더 대화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할 때는 이미 할머니는 세상에 아니 계신 후였다.

네가 지금의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를 인정하는 것이다. 네가 할머니를 부정하고 싫어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수야! 세상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 굳이 먼 일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태풍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을 태풍으로 잃은 그들도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다시 일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면 또 다른 길이 보이는 것이 삶의 법칙이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받아들이고, 이제는 너 못지 않게 힘들어하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눈을 돌려보기 바란다. 세상은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니?

나는 네가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학기 초의 모습처럼 재미있고 활발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그날이 되면 축하하는 의미로 한 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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