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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남산'이라 불렸던 안기부. 중구 예장동 남산 기슭에 위치한 옛 안기부 자리에 유스호스텔을 건립하려는 서울시의 계획에 인권·사회단체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에 인권기념공원을 만들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 총 3회에 걸쳐 그 가능성을 짚어본다...편집자 주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를 찾았던 독일 총리가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동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 받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이 나치에 항거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바르샤바의 게토 영웅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비단 조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해 노르웨이 국적으로까지 바꿔가며 나치와 대적했던‘레지스탕스’빌리 브란트뿐만이 아니다. 1989년 11월 폴란드를 찾았던 헬무트 콜 독일 총리에 이어, 2001년 4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찾은 게르하트르 슈뢰더 현 총리 역시 2차 대전 전몰자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과거사에 대해 사죄했다.

유태인과 동성애자, 정신장애자, 공산주의자 등 소수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지만 지속적이고 진실된 반성을 통해 국내는 물론 주변국과의 갈등을 씻어 가고 있는 독일. 오류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독일의 노력은 비단 정치인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는 나치 만행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교육과 역사 증언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일 최초의 강제 수용소, 다하우에 가다

맥주로 유명한 뮌헨에서 북쪽으로 약 16km만 가면 닿는 다하우시(市).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최초의 나치 집단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 독일 최초의 나치 집단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
ⓒ 권기봉
다하우에 강제 수용소가 들어선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한 지 5주 후인 1933년 3월 10일.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곳 다하우 수용소를 거쳐간 사람들만 16만 명에 달하고,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설치된 150여 개 지부 수용소에 9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33년부터 45년 4월 29일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20만 명 이상의 수감자들이 처형됐지만 영양실조나 질병 등으로 사망한 이들만 해도 약 3만2천 명.

특히 인간 기름을 짰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다하우 수용소는 생체실험을 하기 위한 실험실이 세워졌던 최초의 강제 수용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독일 공군 항공의학연구소 주관으로 고압이나 저온 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실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숙소 입구에 태도 불량자를 목매달아 놓는 곳이 있어 수감자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유발시켰고, 죽은 이들을 이용해 비누나 사료 등을 만들던 작업실까지 남아 있다.

▲ "독일인과 세계인들에게 이런 인권 유린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듯 했습니다.” - 다하우 수용소를 찾았던 안종철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장
ⓒ 권기봉
이후 작센하우젠에 들어선 북부 수용소와 부헨발트에 세워진 중부수용소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다하우 수용소는 후대들에게 평화와 인간성, 인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장소로 변모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난 2001년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비롯, 독일과 이스라엘, 스페인에 있는 인권 관련 시설을 돌아본 바 있는 안종철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특히 감명 깊었던 곳은 독일 다하우 수용소였습니다. 미군이 진격하자마자 많은 건물들이 불탔지만 화를 면한 몇 개 건물만이라도 전쟁이 끝난 뒤 기념시설로 마련해 놓았더군요. 당시 제가 갔을 때도 수천 명이 관람 중이었는데, 독일인과 세계인들에게 이런 인권 유린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듯 했습니다."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나치 독일과 연관이 있는 기념 시설은 다하우 수용소 등 40여 곳의 강제 수용소와 잔트보스텔과 슈타락 등 7곳의 전쟁포로 수용소, 10여 개의 기념관 등 독일 전역에 여러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는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프랑스나 폴란드 등도 마찬가지. 특히 폴란드 남부 그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1940년 4월 27일 나치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위해 세워지기 시작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같은 해 6월 14일부터 그 역할을 시작했다.

이후 41년 10월 들어 3km 정도 떨어진 비르케나우 외곽에 ‘아우슈비츠 2호’를 증축하며 대량학살시설로 확대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1945년 1월까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과 집시, 포로, 정치범들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가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 폴란드 국립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2차 대전 이후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서 현장이 거의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실제로 화장터와 수감동, 감시탑, 고압전류를 흘려보냈던 철조망, 총살장, 가스실 터 등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게다가 사진이나 수의, 안경, 빗, 식기 등 수감자들이 이용했던 물품과 채찍, 군복, 권총 등 가해자들의 도구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해마다 방문하는 50만 명 이상의 관람객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킬링필드의 추억'을 그대로 보존한 캄보디아

가까이 아시아에서도 인권 관련 시설을 살펴볼 수 있다. ‘킬링필드’로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캄보디아.

▲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시신이 침대위에 누워 있다. 캄보디아의 '뚜엉 슬랭' 범죄박물관
ⓒ 홍성담
"광주 5·18 신 묘역의 경우 구 묘역과 달리 죽은 자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으리으리하게 만들려고만 했지 역사와의 대면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물화 되어버려서 그래요. 뚜얼 슬랭은 학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존해 오히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여기에 거대한 시설을 지었다면 느낌이 반감되었겠지요."

2001년 범죄박물관 뚜얼 슬랭과 킬링필드를 직접 돌아본 홍성담 화가의 말이다. 수도 프놈펜의 한복판에 위치한 뚜얼 슬랭은 원래 학교 자리였다. 하지만 75년 4월 17일부터 79년 10월까지 4년 6개월간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였던 크메르루즈에 의해 자신들의 반대파를 잡아 가두고 고문·처형했던 수용소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크메르루즈가 집권을 하면서 학교는 S-21이라는 수용소로 변하게 되었는데 담장 대신 철조망이, 교실 대신 감옥과 고문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당시 학살당했던 200만 명을 기리는 곳으로 바뀌어 있다. 당시 고문에 이용됐던 도구와 함께 사람의 뼈로 만든 캄보디아 지도 등 사람 뼈를 모아 두고 관람객들을 맞고 있는 뚜얼 슬랭 박물관.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되새기며 교훈을 얻고 있다.

"무조건 덮어버린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는 서울시가 유스호스텔을 지으려고 하는 남산 안기부 터에 인권기념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채은아 민가협 총무는 “안기부는 옛 우리 사회 인권유린의 살아있는 증거인만큼 이 자리에 엉뚱한 유스호스텔을 들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안기부 자리에는 인권기념공원이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 뚜엉 슬랭 범죄 박물관의 정원 땅 속에서 발견된 사람의 해골로 만들어진 캄보디아 지도.
ⓒ 홍성담
매일 아침마다 남산에서 조깅을 한다는 안종철 국장 역시 “역사 시설을 만들 때 중요한 것은 현장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라며 “다하우 수용소처럼 고문 도구나 자료를 전시해 학생들이 직접 와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교육 시설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직까지 서로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극단적 대립으로 밖에는 치닫지 못했다”고 평하는 문종석 푸른시민연대 대표. 2001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멕시코 등 남아메리카의 민주화 및 인권 관련 시설을 답사한 바 있는 문 대표는 “그들은 우리처럼 한 번 갈라서면 평생을 대립하고 죽고 죽이는 게 아니라 서로 화해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기억을 되새긴다.

"무조건 덮어버린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친일이나 군사독재 등 잘못된 과거를 반성해본 역사가 없지만 이제라도 달라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갈등과 대립이 언제까지 갈지 몰라요. 이번 인권기념공원 건립 추진은 우리의 인권 의식과 역사 인식을 알아보는 시금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죽은자들의 옷과 그들이 집단으로 묶여 있었던 족쇄. '뚜엉 슬랭' 범죄 박물관.
ⓒ 홍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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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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