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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과 '그 양반'의 몰골, 그리고 추잡함과 이중적 잣대

(전략)오직 이 양반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사(士)라 하고, 정치에 나아가면 대부(大夫)가 되고,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이다. 무반(武班)은 서쪽에 늘어서고 문반(文班)은 동쪽에 늘어서는데, 이것이 '양반'이니 너 좋을 대로 따를 것이다....(중략)

소매자락으로 모자를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끄은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 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수염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볼에 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처를 두들기지 말고, 성내서 그릇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노복(奴僕)들을 야단쳐 죽이지 말고, 마소를 꾸짖되 그 판 주인까지 욕하지 말고,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고, 제사 지낼 때 중을 청해다 재(齋)를 드리지 말고,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후략)


"양반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양반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문서를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하늘이 민(民)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士)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양반의 이익은 막대하니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않고 약간 문사(文史)를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문과(文科) 급제요, 작게는 진사(進士)가 되는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길이 2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음관(蔭官)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日傘)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鶴)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 끄덩을 희희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兩班傳)]의 주요 대목이다.

호랑이로 환생한 김삿갓의 질책

망해가던 양반네가 그러하거늘 그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대부가 '호질(虎叱)'에서는 곧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다. 아마 김삿갓쯤이나 되시는 분이 호랑이로 둔갑하여 고상한 척하던 양반을 꾸짖으니 한 번 보자.

다섯 아이들은 성(姓)이 다르다. 어미인 절개의 상징 동리자와 고상한 선비 북곽선생이 방에서 놀아나고 있다. 지켜보던 애들이 선생을 '여시'가 나타난 것이라 비꼰다. 문에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던 아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덮치기로 작당을 한다.

(전략)다섯 아이들이 한꺼번에 어머니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 선생이 크게 놀라서 달아났는데, 남들이 혹시라도 제 얼굴을 알아볼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한 다리를 비틀어 목덜미에 얹고, 도깨비처럼 춤추며 도깨비처럼 웃었다. 문 밖을 나가 뛰어가다가, 그만 벌판 구덩이에 빠졌다. 그 속에는 똥이 가득 차 있었다. 간신히 붙잡고 올라와 목을 내밀고 바라보니, 이번에는 범(虎)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역질하다가, 코를 막고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에이쿠, 그 선비가 구리구나"하고 혀를 찼다.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았다. (후략)[연암 박지원의 호질 中]


양반들의 눈에 가시가 아닌 게 없고, 상스럽지 않은 게 없으니 민초들만...

이런 양반이 보기에 상놈들이 밖에서 섹스를 하면 데려다가 쳐 죽이는 세상이 있었다.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제 걸로 취했다는 말이다. 그런 족속일수록 자신은 별 짓거리를 다한다. 제집 종이든 길가는 아낙이든, 옆 집 안사람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떤 작자는 귀양을 가서도 일대 여인네를 제 걸로 삼았다. 맘먹으면 맘먹은 대로 되던 세상이니 오죽했을까.

백주 대낮에 유곽이든 풍경 좋은 정자, 자신의 집을 가리지 않고 희롱을 일삼으면서 상민들이 농사짓다 땀에 절은 몸 식히려고 등목 하는 걸 가지고도 '상스럽다', '낯뜨겁다' 한다. '천한 것들은 노는 것도 저리 저질이라니깐'하며 볼 것 다 보고 눈을 돌린다.

그러고 나서 당구 처음 배운 사람이 당구공이 천장에 빙빙 돌듯 그 여인네 몸매가 밤새 아롱거려 잠을 못 이룬다. 작정을 한다. '그래 그 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야! 요절을 내고 말리라.' 오지 않는 잠을 간신히 청하여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다. 첫닭이 울 때부터 설치고 다니니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밤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꼬투리 잡으려면 무에 그리 어렵던가.
"여봐라 저 칠복이네 끌고 오너라."
"예 나으리."
흠씬 두들겨 맞은 칠복이는 죽고, 그 처는 그 날로 종이 되었다.

개들의 섹스, 그 질펀한 광경과 사내아이들

볼 것 안 볼 것 가려서 사는 인간 상위(上位)의 양반(兩班)이 뒷짐 한 번 지고 마실을 나오면 개들도 학질(瘧疾) 앓듯 나약해져서 슬슬 피해 꼬리 내리고 숨기 바빴다. 간혹 양반님네의 출현을 파악하지 못하고 제들끼리 놀기 바쁜데 그 장면을 한 번 구경해보자.

백아(白鵝) 산골에 수놈 누렁이와 암컷 삽사리가 살았다. 개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둘은 거의 짝이나 마찬가지다. 내리 3년째 같이 돌아다녔다. 맛있는 것을 발견하면 손잡고 같이 먹으러 다니던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둘은 올 봄에도 친하게 지냈다. 63일 밖에 안 되는 임신 기간과 두 달여 양육 기간을 마치고 삽사리가 바깥출입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될 무렵 다시 발정이 시작됐다. 삽사리는 새끼 낳았다고 주인장이 듬뿍 주는 기름진 개밥을 먹고 투실투실 살이 쪄 있다.

동물적 감각으로 2세를 낳아 식구를 불려야 당장 초복(初伏) 때나 중복(中伏) 때 잡아먹히지 않을 것을 안 삽사리는 임신을 하기로 작정한다. 순간의 고통이 죽음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수태(受胎)한 동물을 잡아먹는 인간은 잘난 인간 사이에서도 말종(末種) 소리를 듣게 되니 중복까지만 잘 버티면 올 한 해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말복(末伏) 때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농사가 바빠지기 시작하니 보신이랍시고 자신을 잡아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강아지 젖을 억지로 뗀 열흘 후 삽사리에게 반가운 조짐이 있었다. 몰라보게 뒤가 발갛게 충혈이 되고 끈적끈적한 물이 흘러 내렸다. 밤낮으로 집 밖으로 쏘다니다 아이들 무사한가 한 번씩 들어와 보고 갈 뿐이다. 누렁이를 꼬드겨 산으로 들로 이웃 마을로 졸래졸래 다니며 사랑을 속삭인다.

열흘이 지나고 열 하룻날이었다. 하루 더 참아도 되었지만 달아오른 삽사리는 별 반항 없이 몸을 내주고 만다. 이런 통에 누렁이만 벌써 계미년(癸未年) 벽두에 한 번 재미보고 벌써 두 번 장가를 드는 겹경사를 맞이한다.

'애무(愛撫)'의 본디 글자는 '애' 자도 '무(撫)' 자처럼 한자 왼쪽에 손수변이 붙어 있으니 손으로 더듬고 어루만져주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섹스천국 고려시대에 가장 성행했던 '손 없는 애무'가 누렁이에겐 적성에 맞다. 이 쪽에서는 알아주는 카사노바인 누렁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앞에서 몇 차례 달콤한 키스신을 연출하고, 뒤에서 "흠흠" 내음을 맡는다. 얼마 안 가 그 빠알간 물건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돼지처럼 나사형도 아니다. 그냥 민자다.

사랑할 줄 아는 자는 오래 참을 줄 안다. 하지만 어디 뜻대로만 되던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몇 번의 운동 끝에 느낌이 좋아 둘은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이러기를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앞에는 힘겹게 삽사리가 땅을 의지하고 있다. 뒤쪽 위에서는 누렁이가 엉덩짝을 뒷산 산신령께 보이는 형국이다.

이 때 예닐곱 살 되는 사내아이 서넛이 구경을 한다.

"야, 붙었다."
"엉? 참말이네."
"쩌것들 지금 뭣 한다냐?"
"보면 모르겄냐? 붙어서 뺑꼬하잖아."
"우리도 해숙이 불러서 한 번 해볼까?"
"지랄허고 있네 씨벌놈. 해숙이 엄니한테 일러분다~."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누렁이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렇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구경을 끝내면 안 된다. 누렁이 제 의지에 따라 움직인 게 아니다. 위에서 자연스레 밑으로 미끄러져 몸은 한 몸이되 대가리 두 개 달린 괴물이 되어 반대 방향으로 납작 엎드리듯 서로를 끌어가고 있다. 한쌍이 남남이 된 듯 반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도 좀체 빠지지 않는다. 이 때는 힘센 것이 장땡이다. 아이들이 본 그 광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윽고 힘을 쓸대로 써버린 수컷 누렁이가 질질 끌려 다닌다. 흙길에 까만 발굽이 닳기 일보직전이고 돌부리에 채인 뒷발은 피투성이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을 끌고 다니니 지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뙤약볕 정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구경하는 아이들 옆으로 열아홉 살 순이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듯 말 듯 볼 것 다보고 뛰어 지나간다. 아이들 몇이 모여 그 광경을 뚫어져라 침을 질질 흘리며 구경하고 있던 그 때. 어르신 한 분이 지게를 지고 오신다.

"이놈들아 후딱 집으로 들어 가그라. 꼴사납게 뭐 볼게 있다고…."
어른 체면 지켜주려 아이들이 들어가는 척 하다가 이내 다시 나온다. 그러자 어르신은 갖고 있던 작대기로 사정없이 붙어 있는 개를 한번씩 두들겨 팬다.

"깽."
"깨갱." 할 뿐 여전히 분리될 줄을 모른다.

짐을 부리고 돌아온 어르신은 이웃 어르신과 함께 물통을 들고 나온다. 끓는 물 한 양동이를 확 끼얹는다. 그제서야 "깨갱 깽깽" 가냘픈 두 울부짖음이 있고 나서 각자 집으로 갔다.

두 마리 다 힘없기는 마찬가지다. 암컷은 노오란 하늘을 보며 그늘로 들어가 쉬어갔고 수컷은 길바닥 한켠에 앉아 제 물건을 몇 번 핥아주고 길을 나섰다.


로맨스와 스캔들의 차이, 그리고 한국 정치

백아(白鵝) 땅 견공들의 희로애락을 보았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야합(野合)'이라는 거다.

그 장면을 못 볼 것이라며 물을 끼얹었던 어른은 양반 심보를 닮았다. 그 어르신네 핏속에는 여전히 양반 피가 멈추질 않고 속에 절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개 나무라니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선생의 아류다.

하물며 견공(犬公) 개새끼들이 서로 붙어 있는 모습을 양반이 봤다고 상상해 보라.
"저저저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어험~" "에헴"하고는 아랫 것들 시켜서 뜯어말리고 재미보러 갔을 것이다.

양반 자신이 어제 한 행동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견공의 순결한 활동에도 세상에 까발겨지니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모른다. 대낮에 빠알간 물건을 내놓고 앞에서도 아닌 뒤에서 그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암수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질질 끌고 다니기를 두어 시간 하니 꼴사나울 건 그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제가 하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 하니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야당이 3당 합당을 보고 '야합(野合)'이라 비유하여 대단한 반대를 하였다. 몇 년 후 야당끼리의 합당을 하니 뒤이어 '여합(與合)'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는 사회.

그 뒤로 정치가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갔던가. 전면적인 정치권 물갈이는 언제나 가능할까? 동물의 섹스 용어에서 정치 용어가 되어버린 이 말, 참 기이하다. 적당히 퍼주고 양보하고 덮어주고 상생하는 것이 진정한 야합인 것을…. 국민들을 상대로한 야합을 멈추라 제발.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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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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