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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등 혈액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헌혈자를 직접 구해야 한다. 환우회 등 의료단체들은 이같은 방식이 병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월 글리벡 약값 인하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인 백혈병 환자들.
백혈병 등 혈액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헌혈자를 직접 구해야 한다. 환우회 등 의료단체들은 이같은 방식이 병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월 글리벡 약값 인하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인 백혈병 환자들. ⓒ 김진석
"혈액원에서 성분채집혈소판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헌혈자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겠죠. 제 친구들은 천안에서 서울까지 두 번씩 오가면서 수술에 필요한 혈소판을 수혈해줬습니다."

지난해 12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아내 안 모(29)씨의 골수이식 수술을 한 이민호(33, 충남 천안 거주)씨는 친구들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아내의 수술을 위해 필요한 혈소판 수혈을 친구들이 선뜻 나서서 해줬기 때문이다.

당시 안씨의 수술을 위해 혈소판을 제공해야 했던 인원은 약 16명 정도. 이 중 절반 정도의 숫자는 이씨의 친구들이었다. 이씨는 친구들과 백혈병 환우회 등 단체의 도움으로 아내의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십자 혈액원에서 성분채집혈소판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몰랐죠. 병원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해줬어요. 만약 사전에 알았다면 굳이 천안에 사는 친구들을 서울까지 데려갈 필요가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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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와 같은 병원에서 2001년 10월 골수이식 수술을 받은 유진희(32, 안양 거주)씨도 헌혈자를 통해 혈소판 수혈을 받은 경우다. 수술 당시 대학 재학 중이던 유씨는 절친한 선후배, 친구들 덕분에 어렵지 않게 혈소판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씨 역시 혈액원에서 혈소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술을 준비하는 병원 코디네이터실에서 혈액원 혈액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냥 혈소판 혈액이 필요하니까 헌혈자를 구해오라고 했죠."

이씨나 유씨의 경우 집이 지방이라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다지 힘들지 않게 수술을 치러낼 수 있었지만, 먼 지방출신의 환자가 서울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헌혈자를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유씨는 수술전 외래 치료를 다니면서 먼 지방 출신 환자들의 애로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제가 입원 전에 이식병동에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들이 울고 다니는 경우를 본적이 있죠. 지방에서 올라온 경운데, 수술은 빨리 해야 하고 헌혈자들은 구하지 못하고…. 답답한 보호자들은 경찰서나 군부대의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이씨나 유씨가 겪은 일은 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경험이다. 백혈병 환자들은 골수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직접 혈소판을 수혈해 줄 헌혈자를 찾아야 한다. 대형병원들은 거의 환자에게 수술 전 헌혈자의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적십자가 운영하는 혈액원에서 혈액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비교적 싼 가격으로 '성분채집혈소판'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혈액수급을 책임지고 있는 혈액원에서 골수이식 등 수술을 위한 혈소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헌혈자들을 직접 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병원들, 혈액원 성분채집혈소판 "이익 적다" 외면
의료시민단체, "병원들이 공공연한 매혈 부추겨"


더욱이 병원에서는 혈액원에서 혈소판을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를 환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이씨와 유씨도 "혈액원이 혈소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병원측에서는 말해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는 왜 혈액원에서 제공하는 혈소판을 사용하지 않을까.

백혈병 환우회 김상덕 간사는 "채혈 과정에서 병원이 보유한 장비 사용료 등을 받을 수 있는 등 환자들이 데려온 헌혈자로부터 직접 혈소판을 채혈하는 것이 병원 쪽으로 봐서는 훨씬 이윤이 많이 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성분채집혈소판’ 쓰면 1만원 남고
'농축혈소판' 쓰면 10만원 남는다?

▲ 혈액원에서 나온 2002년 성분채집혈소판(위)과 농축혈소판 공급 현황. 농축혈소판 사용이 10배 이상 많다.
일반적으로 백혈병 환자들이 혈소판 수혈을 받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헌혈자로부터 직접 수혈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혈액원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

혈액원으로부터 공급받는 혈소판은 크게 성분채집혈소판과 농축혈소판이 있다. 성분채집혈소판은 혈액성분 채혈기를 이용하여 한 명의 헌혈자로부터 혈소판만을 채집하는 성분헌혈에 의해 얻어지는 혈액제재다.

이에 반해 농축혈소판은 전혈로부터 혈소판을 분리하여 만들어지는 혈액제재며, 6팩으로 이뤄진 1단위의 농축혈소판에는 헌혈자 6,7명의 혈소판이 혼합돼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1명의 혈소판만으로 이뤄진 성분채집혈소판을 사용하는 것이 몸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성분채집혈소판보다 농축혈소판 사용을 선호하고 있으며, 이보다는 환자들이 헌혈자들에게 직접 수혈 받도록 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의료시민단체들은 병원들의 이런 치료방식이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보통 혈액원에서 병원으로 제공되는 성분채집혈소판 1단위 가격은 18만여원. 병원에서는 이를 다시 환자들에게 19만원 정도로 제공한다. 1단위에 1만원 정도의 이익이 생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 농축혈소판이 혈액원으로부터 병원에 제공되는 가격은 15,6만원선. 병원에서는 이를 환자들에게 제공할 때 25,6만원 정도의 수가로 산정한다. 6팩 1단위의 농축혈소판의 수익이 10만원 가량에 이르는 셈이다.

한편 환자들이 헌혈자를 통해 병원에서 직접 수혈을 받을 경우, 혈액검사비 5만원과 수혈비 28만원 등 33만원의 수가를 계산해야 한다. 건강세상 네트워크 강주성 대표는 “병원의 이익이 성분채집혈소판, 농축혈소판, 헌혈자의 직접헌혈 순으로 커지므로, 당연히 병원은 헌혈자의 직접헌혈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또 “보통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농축혈소판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며 “충분히 성분채집혈소판을 쓸 수 있는데도 농축혈소판을 고집하는 것은 병원측의 이익을 위한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 김영균 기자

김 간사는 "혈액원에서 채혈한 성분채집혈소판이나 헌혈자들이 병원에서 직접 헌혈한 혈소판의 성분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이익을 위해 혈액원 혈소판을 요청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이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받으면서 헌혈자를 구하러 다니고, 치료비 이외의 돈을 써야하는 등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우회나 건강세상 네트워크 등 의료시민단체들은 이 같은 혈액수급체계의 불합리성 때문에 공공연한 '매혈'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방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의 대형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경우, 혈소판 수혈을 위해 2번 이상 병원을 찾아야 하는 헌혈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김 간사는 "대형병원의 이식병동에 가면 낯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헌혈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며 "요행히 헌혈자를 구한다면 차비, 사례비 등 가외의 지출이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건강세상 네트워크 강주성 대표도 "어떤 보호자들은 아예 주머니 속에 현금 5만원이 든 봉투 10여개를 가지고 다니며 헌혈자를 구하러 다니기도 한다"며 "낯모르는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해 가며 헌혈을 해준 탓에 사례비 정도는 기본적으로 지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양에 거주하고 있는 유씨도 비록 절친한 선후배들로부터 헌혈을 받았지만 사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유씨는 "헌혈하러 온 친구, 선후배들에게 3만원권 도서상품권을 선물했다"고 밝혔다.

강 대표는 "헌혈자에게 사례비로 5만원, 10만원을 주는 것이 바로 매혈 행위"라며 "병원 쪽이 환자들의 매혈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헌혈자 구하도록 하는 것은 급박한 상황 대처 위한 것"
전문가·시민단체 "혈액원, 병원들 혈액수급으로 돈벌이 나서" 비판


이씨와 안씨가 골수이식 수술을 받은 여의도성모병원.
이씨와 안씨가 골수이식 수술을 받은 여의도성모병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편 병원측에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골수이식 수술의 특수성, 수혈감염 등의 안전성을 이유로 헌혈자를 이용한 즉석 헌혈을 선호하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다.

여의도성모병원 코디네이터실 관계자는 "환자들에게 헌혈자를 모셔오도록 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며 "이식수술 후 회복과정에서 합병증이 많이 발생하는데 이럴 경우 환자에 대한 치료가 급박하므로, 급박한 경우를 대비해 곧장 헌혈을 받을 수 있는 헌혈자를 준비해 놓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혈액원에 혈소판을 요청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헌혈자가 꼭 필요하다"고 전했다.

혈액원에서 성분채집혈소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환자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병원측에서는 "혈액을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설명해 주고 있다"고 밝혔다. 성모병원 관계자는 "시급한 경우가 발생할 경우 혈액이 급히 필요하다는 내용을 설명해주면 대부분의 환자들이 이해한다"며 "병원의 이익을 위해 헌혈자를 구해 오라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 아산병원 홍보실 관계자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혈액원 혈액의 수혈감염 등 안전성 문제 때문에 헌혈자를 환자가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혈액원측에서도 채혈량이나 보유량 부족으로 가끔 병원의 공급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중앙혈액원 혈액공급과의 한 관계자는 "채혈량이 부족하거나 하면 병원으로 혈액이 못 가는 경우도 있고, 가끔 모자란 경우도 있다"며 "하지만 전국에 있는 혈액원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어 부족한 혈액은 자체적으로 메울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환우회 등 환자모임과 의료시민단체들은 병원측의 이런 답변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강주성 대표는 "보통 다음날 수술을 하게 되면 필요한 혈액량이 정해지고 충분히 구할 수도 있는데 급박한 상황 때문에 헌혈자를 구해오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또 간혹 급박한 상황이 생겼을지라도 한 두 시간 내에 환자가 죽을 정도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비록 급박한 치료상황, 안전성 등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환자가 직접 헌혈자를 구하는 현행 체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환자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명희 (재)천주교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명운동부장은 "현행 헌혈제도나 혈액수급 체계 전반을 고쳐야 불합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인천지역 혈액원에서 의사로 10여년간 근무한 김 부장은 "현재 혈액원이나 병원은 환자의 치료보다 혈액수급을 통한 돈벌이에 나서는게 사실"이라며 "성분채혈혈소판의 경우, 혈액원에서도 돈이 되지 않고 병원에서도 돈이 되지 않아 병원 쪽에서는 요청조차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부장은 "혈액원의 전문성 강화, 범정부적인 헌혈 장려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고, 적십자 혈액원이 독점하고 있는 혈액사업에 민간 사업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러한 제도적 개선이 없는 한 혈액원과 병원의 무사안일 혹은 횡포에 환자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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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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