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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회의가 있다고 해서 다른 날보다 1시간 빠른 새벽 6시 30분에 당신을 깨우고, 씻는 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앉아 <예순에 사랑을 알다>를 읽습니다.

12년을 막 넘긴 내 결혼 생활의 두 배 혹은 세 배가 넘는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슬며시 웃음 짓기도 하고, 괜히 코가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을 깜박거리기도 하면서요.

부부란 이런 걸까요. 사랑에 눈 멀어 물불 가리지 않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든, 아니면 미처 친해질 사이 없이 조금 서먹하게 시작된 결혼 생활이든,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의 때를 묻혀가며 한 해 한 해 같이 나이들어 가는 것 말이에요.

두 사람 사이의 무수한 갈등과 다툼, 경제적인 고비, 자녀 기르는 일의 어려움, 부모님 봉양과 뜻밖의 질병 그리고 죽음까지. 이 모든 것을 같이 겪어낸 부부는 그렇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끈끈한 동지적인 유대감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책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쓴 엽서 한 장 분량의 러브레터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50세 이상 되신 분들의 글들이기 때문에 그 분들이 걸어오신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데다가, 165편의 글들이 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루는 가정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이 골고루 다 녹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책 속의 남편들은 요즘과 달리 자기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무뚝뚝한 사람들이고, 아내들은 가정에 헌신적인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평생 '회사 인간'으로 살아온 남편들의 후회, 고생한 남편들에 대한 아내의 감사, 남편이나 아내의 병을 겪으며 두터워지는 사랑, 그러면서 자녀들을 다 떠나보내고 일에서도 은퇴하고 다시 둘만 남은 부부는 다시 한 번 잘 해보자고 다짐을 합니다.

결혼 3년 되던 해부터 헤어지겠다며 갈등하더니 7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후배 부부에게도, 남편의 갑작스런 뇌졸중 수발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옛 상사 부인께도 저는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부부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결정에, 그 분의 남은 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딱 10년 전인 1993년, 둘째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 부탁으로 교회 대학부 주보에 쓴 것이라며 내게 주었던 글 생각나는지요? 기억나지 않는다구요?

당신이 내게 직접 보낸 편지는 아니지만, 나는 당신한테 화가 나고 속이 상하거나 부부가 산다는 것이 이런 건가 싶을 때 살짝 꺼내보곤 한답니다. 그러면 어느 새 마음이 누그러지거든요. 당신도 그 때로 돌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첫 마음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내를 수술실로 보내고

10월 26일 오후 1시 40분. 아내를 실은 수술차는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경계로 남편인 저는 수술실 밖에 남겨져 '남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파란 시트에 덮인 아내를 실은 수술차가 드디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제 마음은 갑자기 밀려오는 초조감에 휩싸였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둘째 아이를 낳기 위해서 수술실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왕절개를 하는 수술이니 다른 수술보다 위험성이야 높지 않겠지만 수술실 밖에 있는 저의 마음은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긴장감은 풀려갔지만 오히려 새롭게 떠오르는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수술실을 마주한 이 짧은 이별이 혹시 영원한 이별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고개를 슬그머니 내밉니다. 또 수술차 위에 실려간 저 약한 사람을 홀로 놓고 문 밖 멀리에서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안타까움도 제 가슴을 저며옵니다.

저는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간 수술실 복도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10월의 푸른 가을 하늘을 머리 속에 담아 놓기 위해서 눈으로 사진을 꾹꾹 눌러 찍어 봅니다.

가끔씩 수술실에서 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실려간 수술차에 실려 다시 복도로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복도에 늘어서 기다리고 서있던 환자의 가족들이 혹시 자기네 환자가 아닐까 싶어 빠르게 지나가는 수술차 위의 환자를 확인합니다. 이런 술렁임이 몇 차례 지나갔습니다.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간 지 30분쯤 지났을 때입니다. 수술실에서 간호사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면서 보호자를 찾습니다. 저는 뜨끔 놀라면서 간호사에게 다가갑니다. 간호사는 분홍색 담요에 싸인 저희들의 둘째 아이를 보여줍니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설명해 달라는 아내의 얘기가 떠올라 아기의 얼굴을 살펴보지만 첫째 때처럼 그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아기의 얼굴보다 아내가 더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간호사에게 산모의 상태를 물었지만 수술중이라는 짤막한 답변 밖에는 되돌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아내가 수술실에서 되돌아와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아내를 실은 수술차가 수술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취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수술차 위의 아내 모습은 아름다운 전사(戰士)같았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해산의 고통을 여자가 지은 죄의 결과로 얘기하지만 저는 해산의 고통에서 거룩함을 느낍니다. 저는 마취에서 깨어나는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얼마 후 의사가 찾아와서 수술이 잘 끝났노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아기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 선물을 그냥 값싸게 주시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내는 병원에서 며칠 더 머물렀습니다. 저는 링거가 꼽힌 스탠드를 밀어주며 아내의 걷는 연습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병원 복도에서 잠시 잠시 앉아 쉬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가면서 아내와 한 가닥 씩 굵은 동아줄로 서로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충동이 아닌 듯 합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결단 중에 잘 한 것이 딱 세 가지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아닌 당신과 결혼한 것, 아이를 하나만 낳자는 당신의 뜻에 반대해 둘째를 낳은 것,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노인복지 분야를 선택한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예순 되기 전이라도 나 사랑을 알았노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썼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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