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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민회관 주차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대구시민회관 주차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 김광재
그런데도 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던 시민들 중 일부는 이제 유족들이 심하다고 비난한다. 물론 희생자 대책위가 일부 잘못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곰곰이 살펴보면 단순히 그들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100여일이 지나도록 해결이 안되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조해녕 대구시장은 현장훼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퇴했어야 했다. 방화는 시장의 책임이 아니지만, 그 때문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시장 책임이다.

이는 일상적으로 감수해야할 위험의 범위를 넘은 것이며, 그 부분에 대한 시민의 안전은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장까지 훼손했다면 아무리 민선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고 수습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이 이어졌고, 거짓말은 분노를 키웠다. 대구시는 희생자 가족들의 입장에서 위로하고 함께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대구시는 책임자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협상의 상대방 혹은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대구시는 '장례 먼저 치르는 사람부터 보상금 협의하겠다'는 등 여러 차례 유족들을 '거래'를 시도했다. 지킬 의지도 없는 약속을 남발하면서, 유족들이 지치고 시민들이 무관심해지기를 기다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갈등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에서는 유족들이 지나치다는 비난여론이 퍼져갔다. 대구시의 노련한(?) 전술이 맞아떨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사고 이후 전국적인 성금 모금과,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는 우리 사회의 따뜻한 가슴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때는 함께 가슴 아파하고 함께 분노할 때였다. 그러나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냉철한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2백에 가까운 생명이 꺼져가며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풀어가야 한다.

그런데 조 시장이 그 자리에 눌러앉아 있음으로 인해, 대구시민들은 2백명 가까운 생명의 대가로 얻은 소중한 반성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무책임과 무원칙한 '협상' 때문에 대구시민들은 진지한 성찰을 해야할 그 중요한 시간을 '짜증'이라는 또 다른 감정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중앙정부에 지하철 떠넘기기가 대책의 전부인 대구시를 준엄히 꾸짖어야 한다. 인력타령, 설비타령, 결국 돈타령만 하는 대구시와 지하철공사에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라고 요구해야한다. 아무리 시스템이 갖춰져도 재해는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안전의 마지막 담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그러므로 현실의 문제다.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1/n씩은 이번 참사에 책임이 있다.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지 않은 책임, 개발사업을 미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에게 동조한 책임, 안면 때문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덮어둔 책임, 아이들에게 안전불감증이란 고질병을 유전한 책임…….

그러나 이번에도 큰 고기는 다 빠져나갔으므로, 보통 사람들의 책임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 되고 말았다. 책임이란 말이 갖는 의미는 힘이란 말의 그것에 매몰됐다. 반성이 없으므로 변화는 없다.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시민들은 다음 참사 때 가족들이 화를 면하기만 바랄 뿐 다른 도리가 없다.

최근 조기현 대구부시장이 취임하면서 유족들과 대구시와의 불신이 조금씩 걷히고 있어 다행스럽다. 대구시도 U대회를 두 달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수습을 더 끌 수는 없는 형편이다. 운이 좋으면 U대회는 큰 사고 없이 잘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벽을 넘어 하나로, 꿈을 펼쳐 미래로'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그러나 대구시와 시민들이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에 머문다면 지하철의 벽을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U대회 외국 기자들 중에 어느 눈밝은 이가 '지하철 참사 그 이후'를 들여다본다면, 대구의 부끄러움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향할 것이다.

추모공원 관련 두개의 모임...너무 큰 시각 차이

지난 7일 오후 3시 대구시민회관에서는 조기현 대구부시장이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과 간담회를 갖고 추모사업 등 현안에 관해 유족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조 부시장은 대구시의 의지는 확고하다고 말했고, 유족들도 이번에는 믿어보자는 분위기였다.

간담회 마지막에 조 부시장은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 소개된 딸을 잃은 유족으로부터 대구시를 믿어도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TV를 보았다고 말한 뒤 목이 메어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20여년 키운 외동딸을 보내고, 갓 태어난 딸의 울음소리며 어릴 적 부르던 노래 소리를 녹음해둔 테이프를 듣는 장면을 떠올린 것 같았다. 겨우 진정한 조 부시장은 열심히 하겠다는 말 한 마디를 남겼다.

같은 시각 대구월드컵 경기장 앞에서는 인근 주민 1백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으로 시작한 집회는 그러나 수성구 삼덕동에 묘지는 안된다는 주장으로 일관하며 시의 무능한 행정을 질타했다.

이 지역 토박이들이 대부분인 이날 집회 참가자들의 주장에는 그들이 수십년간 그린벨트, 공원지역으로 묶여 고통을 받은 데 대한 불만이 녹아 있었다. "고산주민도 그린벨트에 묘지 못썼다"란 피켓이 그런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수성갑 지구당에서 내건 "외국인이 찾을 관광지에 공동묘지 웬말인가?"라는 현수막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외국인이 찾는다고 묘지 조성 못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지금 거론되는 후보지는 월드컵경기장에서는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다.

또 후보지는 대공원 예정지 밖에 있는데다, 유족들은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을 해서 묘역을 꽃밭처럼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 대공원 부지 밖에 있어도 문제가 된다면 후보지 옆의 천주교 묘지도 다 이장을 해야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 하나 "살기좋은 수성구에 공동묘지 뭔말이냐?"란 구호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이는 "사고는 중구에서 났는데 묘지를 수성구에 조성하는 것은 수성구민의 자존심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수성구는 대구지역에서 아파트 값도 가장 비싸고, 도로도 잘 닦여 있고, 학군 좋다고 위장전입까지 하는 곳이다. 유족들은 안전교육장 가까이에 묘역을 두는 것이 죄없는 가족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 마음에 공감하는 넉넉한 마음이 더 명예롭고 자존심 가질만한 일이 아닐까? /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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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쳤습니다.오마이뉴스 대구/경북지역 운영위원회의 제안으로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대구경북지역 뉴스를 취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 뉴스가 이 지역에서도 인정받는 언론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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