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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춘 시내 인민광장의 전승기념탑
ⓒ 박도
장춘의 밤

다시 남도 빈관에 여장을 풀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빈관 주인은 조선족으로 경상도 말투였다. 선대의 고향이 경남 진주라고 했다. 빈관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요즘은 여기까지 한국의 불경기 여파가 미친다고 했다.

최근 몇 해 동안 한국 유학생들이 이곳 장춘 대학까지 유학을 와서 때아닌 호황을 누렸으나, IMF 이후에 그들 대부분이 귀국했다고 한다.

한국의 대학 진학 열풍이 여기까지 미쳤다니…. 지구촌 간 데마다 외화를 마구 뿌렸으니 외환 위기가 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 기업인들 중, 일부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조선족 여인을 현지 아내로 만들어 살림을 차렸다는 따위의 얘기를 들을 때는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지난날 우리가 일본인들의 그런 추악한 꼴을 ‘경제 동물’이라고 욕했으면서도 그대로 배워서 같은 짓을 남의 나라에 가서 하고 있다니 그저 말문이 막혔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나 보다.

저녁을 먹은 후, 장춘 밤거리를 돌보고자 빈관 주위를 산책했다. 골목마다 석탄 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꼬지 고기를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 시내 곳곳에는 온통 개발 붐이다.
ⓒ 박도
웃통을 홀랑 벗은 남자 종업원은 부채로 석탄 불을 지폈고, 길거리 여기저기에 놓인 원탁 테이블에는 남녀 손님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금방 구운 꼬지를 안주 삼아 고량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또 다른 골목에는 전등 아래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트럼프를, 한 쪽에서는 마작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1930년대의 칙칙한 건물에 어두운 밤거리라 금방 어디선가 한 무리 마적 떼가 불쑥 나타나서 나그네의 앞길을 막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으스스하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재빨리 빈관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장춘이 아직도 옛 만주국 시대의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음습한 분위기로 비쳤다.


▲ 중국 대륙을 온통 뒤덮고 있는 붉은 깃발.
ⓒ 박도
관동군사령부

1999년 8월 8일 (일)

4시에 잠이 깼다. 같은 방에서 이틀을 잔 탓인지 모두가 낯이 익었다. 6시에 출발하기로 하였으니 다소 여유가 있었다.

오늘 주요 답사 예정은 석주 선생이 만년을 보내다 돌아가신 서란(舒蘭)현 이도향 소과전자촌(燒鍋甸子村)이다.

지도를 펴놓고 해당 유적지를 책에서 찾았다. 책에서 여러 번 봤던 지명이지만, 머리에 확실히 새겨지지 않았다. 역시 역사 현장은 답사해야만 머리에 확실하게 새겨질 모양이다.

세면을 하고 여장을 꾸린 후, 빈관 로비로 나갔다. 나흘 전에 신세졌던 왕빙이 승용차를 몰고 와서 빈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 동안 왕빙은 우리와 침식을 같이 하면서 선양(瀋陽)까지 동행한다고 했다.

그도 다시 만나 반가웠던지 손을 치켜들며 미소로 반겼다. 나도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서툰 중국어로 '하오 하오, 세세'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 중국 공산당 장춘시위원회
ⓒ 박도
오늘 여정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장춘을 그대로 떠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이곳은 지금은 길림성 성도(省都)지만, 한때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으로 불렸던,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인연이 깊은 도시였다.

일본군 관동군사령부 옛 터도, 만주국 건국대학교도, 만주 군관학교 옛 터도 모두 이 도시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이 선생은 김 선생에게 이들 유적지를 열거하면서 그 중에 건국대학교를 찾자고 부탁드렸더니, 벌컥 화를 내셨다.

“우리가 뭐 한가하게 관광 다닌 줄 아시오? 관동군사령부는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건국대학교는 우리의 답사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요. 차라리 박정희가 다녔던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소?”

나와 이 선생은 아무 대꾸를 못하고 김 선생의 처분만 기다렸다. 오늘 일정이 빡빡하고 서란현 소과전자촌은 김 선생도 한 번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이기에 예정대로 마칠 수 있을 지 자못 염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 장춘 교외에 있는 날랄툰 소학교,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옛 만주군관학교가 있다(2000. 8 제2차 답사 때 촬영).
ⓒ 박도
나는 김 선생의 말씀 중에 ‘박정희가 다녔던 만주군관학교’라는 말에 가슴 아팠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와는 동향으로 초등학교 대선배다.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그분이 우리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이었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신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 중위였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그 점이 민족 정기 면에서 크나큰 흠으로써 평생을, 아니 사후에도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어디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그분뿐이랴. 우리 국군 창군 주요 인물과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인사 중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정일권, 백선엽, 원용덕, 김백일, 김일환, 장은산, 이한림, 김동하, 이주일 …….

이들은 그 어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지 모르지만, 만주군관학교 지원 당시 일제의 선전 문구 ‘왕도낙토(王道樂土)’니, ‘오족 협화(五族協和)’니 ‘일만일여(日滿一如)’ 따위의 말에 속아서, 또는 집안이 가난하여, 아니면 국권을 잃은 조국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입교했으리라 생각된다.

▲ 우리나라 현대사에 주역을 배출한 옛 만주군관학교, 지금은 중공군 전차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정문을 찍지 못하고 담과 막사 일부만 찍었다(2000. 8 제2차 답사 때).
ⓒ 박도
하지만 졸업 후 이들 중에는 다시 일본 육사에 유학하여 일본군 장교로 일제에 충성을 다했고, 그 중 일부는 한때나마 독립군 토벌에 가장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의 기간요원으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음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들의 이러한 전력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당신 목숨조차도 지푸라기처럼 여긴 독립투사와 그 후손에게는 민족 반역자로 비쳤을 것이다.

광복 후, 이들이 민족 반역에 대한 진정한 참회와 죄 닦음도 없이, 오히려 지난 전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정부 고위층이 되어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장 단상에서 독립유공자에게 훈장을 주는 장면은 우리 현대사에 한 편의 희극이요, 비극이었다.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는 세계대전 후 그 어느 나라(우리나라보다 더 후진국도)에서도 식민지 국가에 충성을 했던 자가 정권을 잡은 예가 없다고 통탄했다.

▲ 지난날 만주국 실질적인 권력의 심장부인 관동군 사령부, 현재는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
ⓒ 박도
출발 후, 곧장 일본군 관동군사령부 옛 터로 갔다. ‘관동군사령부’는 지난날 만주국 실질적인 권력의 심장부로 우리 독립군에게는 원한이 서린 기관이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이황궁은 글자 그대로 허수아비 궁전이었고, 만주국 모든 통치는 관동군사령부로부터 나왔다.

이곳은 만주 땅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고, 독립투사를 잡아 가둬 고문하고 살육했던, 그 모든 만행을 총지휘한 소름 끼치는 대륙 침략의 심장부였다.

관동군사령부는 아직도 옛 만주국 당시 모습 그대로, 그때 지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당시 우리 선열들은 이곳을 바라보며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나는 새하얀 왜색 풍의 옛 관동군사령부를 보는 순간 선입관 때문인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이 건물은 현재 길림성 공산당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바, 국기 게양대에는 지난날 욱일 승천(旭日昇天 : 아침해가 솟음)했던 일장기 대신, 붉은 중공기가 펄럭였다.

청사 정문에는 중공군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경비병에게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사정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손을 가로 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그대로 놓치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불법인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차창을 열고, 문틈으로 카메라를 내밀고 차를 천천히 달리게 하면서 얼른 셔터를 눌렀다.

왕빙은 카메라 셔터소리를 듣고는 곧 쏜살처럼 그곳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경비병들이 뒤쫓아오는 소동은 없었다. 앞자리의 김 선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길림성 문화활동 센터
ⓒ 박도
이런 일로 그들에게 붙들리면 간첩으로 오인 받아서 신체 구금을 당하거나, 벌금을 물어야 하고 카메라나 필름도 압수 당할 뿐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가다 보면 하루 이틀 답사 일정은 아예 망쳐버린다고 김 선생은 앞으로 사진 촬영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우리나라 정부 기관에 낯선 외국인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사진을 찍겠다면 경비병이 허락해 주겠어요? 솔직히 말해 중국인들은 한국사람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아요. 개방 후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몰려와서 번질하게 말만 남기고 간 뒤에 깜깜 무소식이었던 게 한두 건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는 한국사람이라면 별로 신용이 없어요.”

만주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김 선생은 이곳 사람들의 정서를 환히 읽고 있었다. 하긴 처지를 바꿔보면 오히려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너그러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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