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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에 다시 밭을 갈아 엎어야 하는 화학농 하시는 할아버지
한 달만에 다시 밭을 갈아 엎어야 하는 화학농 하시는 할아버지 ⓒ 전희식
마른하늘 쳐다보느라 고개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다보니 동네 사람들은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도랑에 호스를 박고 물을 밭으로 끌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유능한 재단사가 연필과 자를 들고 북북 손쉽게 옷감 자르듯이 나도 괭이자루 휘두르며 밭을 바둑판처럼 금을 그어가며 콩, 참깨, 옥수수, 생강, 서리태 등을 심고 있다. 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나뭇가지 위에 떼를 지어 앉아서 어디 콩을 뿌려만 봐라 내 밥이다 하고 내려다보는 까치들이 그 첫 번째요 이 가뭄에 씨앗들이 제대로 날까 싶은 게 두 번째다.

그래서 생각 해 낸 것이 씨앗을 뿌리기 전에 타 놓은 골에다 물을 뿌리고, 씨앗을 흙으로 묻은 다음에 또 물을 뿌려주기로 한 것이다. 허수아비도 하나 만들까 했지만 까치는 날이 어두워지면 활동을 안 하는지라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풀과 함께 자라는 우리 감자. 적당히 풀이 있어야 그 뿌리 덕에 땅이 부드러워지고 습기도 보존한다.
풀과 함께 자라는 우리 감자. 적당히 풀이 있어야 그 뿌리 덕에 땅이 부드러워지고 습기도 보존한다. ⓒ 전희식
"새들아~ 새들아~" 목을 놓아 아들을 불렀다. 버스 종점 근처에서 옆집 양곤이랑 자전거를 타고 놀던 새들이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쳐다도 안 본다. 양곤이가 새들이에게 뭐라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새들이가 왔다.

또 일 시킬게 뻔하다는 걸 아는지라 마뜩찮은 표정이지만 모른척하고 물 호스를 쥐어 주고 나는 괭이를 다시 잡았다. 다음 주라도 비가 온다는 예보만 있다면 파종을 좀 미루겠지만 물을 줘 가며 파종을 하려니 일이 몇 곱절 힘들다.

일이 힘들다는 것은 일 속에서 내가 일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 그 자체는 힘듦과 수월함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일 그 자체일 뿐이다. 마음과 일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힘이 드는 것이다.

지난달 틱낫한 스님과 3일간 함께했던 걷기명상 때의 느낌으로 괭이를 다시 잡았다. 손바닥 세포 하나하나가 눈을 뜨면서 괭이자루를 감싸 안는다. 살살 긁어 올리는 흙의 감촉이 괭이를 통해 전해 왔다. 대지의 숨결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괭이를 당기며 씨앗들에게 축원을 보내고 괭이를 들어 올리며 콩을 떠 올렸다. '부디 잘 자라세요' 호흡도 맞추어 나갔다. 절대 당신들 위로 독약 뿌리지 않고 장마 때는 물고를 잘 터주고 가뭄 때는 물을 뿌려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마른 땅이지만 개의치 말고 싹을 틔우라고 당부했다. 자연히 허리도 펴지고 어깨에 힘도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 어제 할아버지가 그랬었지.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게 뭔 말인지 알어?’ 밭 언저리에서 서로 눈길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날씨 얘기를 하다가 콩이 깊게 묻힌 놈은 나고 얕게 뿌려진 놈은 말라 죽는다고 했다. 그 말을 떠 올리며 콩을 좀 깊게 묻어 주었다.

양곤이랑 새들이가 물 뿌리개로 콩 심는 밭에 물을 뿌리고 있다.
양곤이랑 새들이가 물 뿌리개로 콩 심는 밭에 물을 뿌리고 있다. ⓒ 전희식
그야말로 콩알만 한 것이 한 철 잘 가꾸면 100배 200배로 수확을 하니 번식력으로 봐서는 우리 인간의 할배뻘이구나 싶었다. 콩 한 알도 우주 차원에서 바라보면 나보다 못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어제 할아버지는 내게 아주 큰 무안을 당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이 히시기. 자네 감자밭 하나 기가 막히네. 나 한 고랑만 주게. 내가 잘 키워서 서로 반타작 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내 감자밭이 우리 동네서 제일 잘 되고 있는 것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지만 할아버지 감자밭은 어떡하고 내 감자를 한 고랑 달라고 하시나 의아했다.

할아버지 말씀이 나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게 했다. 감자가 다 썩어버렸다는 것이다. 윗집 기정이네랑 반 박스씩 나눠 심었는데 기정이네는 감자가 잘 났지만 할아버지는 잿간에다 음식물 찌꺼기를 뒤섞어 거름으로 주었더니 감자 씨가 다 썩어 버렸다는 것이다.

작년 겨울 내내 모은 오줌을 가져왔다. 잘 썩은 오줌은 좋은 거름이다. 잎과 줄기를 잘 자라게 하므로 감자밭에는 물을 타서 쬐끔 뿌린다.
작년 겨울 내내 모은 오줌을 가져왔다. 잘 썩은 오줌은 좋은 거름이다. 잎과 줄기를 잘 자라게 하므로 감자밭에는 물을 타서 쬐끔 뿌린다. ⓒ 전희식
나는 한 고랑 아니라 반 고랑도 못 준다고 했다. 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분한테 주었다가 다 자란 감자 '조져'버리면 어떡하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친 김에 나는 전문용어까지 동원하여 할아버지를 놀려 먹었다. 이른바 C/N 비(比) 얘기까지 해 버렸다. 북을 다 했지만 여전히 풀들이 주삣주삣 한 내 감자밭에 풀약(제초제) 뿌리라고 훈수를 하시던 할아버지는 어허 참! 허 참~ 하시며 입맛만 다시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나는 한참을 웃었다.

새들이와 양곤이네 남매가 밭 언저리에 무성한 꽃들로 팔찌와 반지를 만들어서 잘 찍어 달라고 손을 내 밀었다.
새들이와 양곤이네 남매가 밭 언저리에 무성한 꽃들로 팔찌와 반지를 만들어서 잘 찍어 달라고 손을 내 밀었다. ⓒ 전희식
새들이 녀석은 어느새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양곤이는 물론 그 동생인 예림이까지 불러서는 물뿌리개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해 보여 서로 물 뿌리겠다고 만들어 놓고 자기는 옆에서 잔소리만 하고 있다. 가위바위보를 하면서까지 서로 물뿌리개를 잡겠다고 야단이다.

제일 막내 예림이는 나 보고 자기는 자꾸 진다면서 한번만 뿌리게 해 달라고 조르기까지 한다. 사타구니에 끼워서 오줌 싸듯이 양곤이가 물을 주자 새들이가 자기가 하겠다고 뛰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셋 다 어디론가 사라지나 했더니 팔목과 손가락에 꽃팔찌와 반지를 이쁘게 만들어서 나타났다.

날은 어두워지고 감나무위에 조롱조롱 열렸던 까치들도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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