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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일 오전이었다.

밭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하는 첫 마디부터 뭔가 감격에 들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뭔가 했더니 지금 막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한빛고등학교 취재기사가 첫 화면에 떴는데 그것도 위에서 세 번째로 올라 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쓴 기사가 첫 화면에 올라간 게 어디 한 두 번이라야 내가 놀라지 뭐 그걸 가지고 난리냐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색을 하고는 한빛고가 어서 정상화 되어야 하는데 그 참 잘 된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사람도 오죽 했으면 전화까지 했으랴 싶었던 것이다.

며칠 전. 폐교 위기에 놓인 한빛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내일이면 우리 지역에 도착 하는데 취재를 해서 오마이뉴스에 꼭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는 사실 ‘야 그거 아무나 써 가지고 올리면 되는 거야. 내가 뭐 말이 기자지 쥐뿔도 아냐. 나 역시 그냥 맘 내키면 써서 올리고 아니면 말고 그래’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제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나 같이 글발(?) 있는 사람이 써야 기사가 크게 날거 아니냐는 것으로 이해하고 내가 흔쾌히 그러마고 했었다.

전라북도교육청 기자실에서 한빛고 국토 대장정 팀의 기자회견이 오전 9시 반에 있다고 전달 받았던 나는 새벽 5시경부터 감자밭에 매달렸었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던 것이다. 이날 김매기를 끝내지 않은 채 비가 쏟아지면 일이 몇 배 늘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감자농사는 기가 막히게 잘 되고 있다. 그러나 농사라는 게 잘 되다가도 한 번 실기를 하면 망치는 것이다.

죽을 둥 살 둥 허리 한 번 못 펴고 괭이질에 낫질에 호미질을 하다보니 시간이 덜컥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샤워 하면서 면도하고 면도하면서 발씻고 취재수첩(?) 챙기고 볼펜. 그리고 얼마 전 구입한 256메가 짜리 프래쉬 메모리를 끼운 400만 화소짜리 디카까지 챙겨서 시내로 줄달음쳤다.

바로 그때 띠리릭 전화가 왔다. 두어 번 전화를 걸어왔던 한빛고 학부모였다. 기자회견이 10시 반으로 연기 되었단다. 오마이 갓. 제기랄.. 지금이 9시가 넘었는데 이제 알려 주면 어쩌라고... 집으로 가자니 오가는데 시간 다 뺏길 것 같고 밭에 늘어놓은 농기구가 그대로 비 맞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투덜투덜 차를 몰고 전교조 사무실로 갔다. 인터넷 자료나 더 뒤져 볼 생각이었는데 그곳에 한빛고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 하고 얘기를 하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내가 젊었을 때 다니던 성남 주민교회 교인인 것이었다.

담임목사인 이해학 목사님 이야기도 하고 장로님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알 만한 장로님의 딸이라는 게 확인 되었다. 그 여학생이 84년생이라고 했으니 내가 주민교회를 떠난 후에 태어난 것이다. 노는 물이 같으면 이렇게 자식 대에 가서도 만나나 싶었다.

창원에서 왔다는 학부모 한 사람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족보를 맞춰보니 이 사람을 내가 알고 저 사람을 그 사람이 알고 이런 식이었다. 그 학부모는 대뜸 내게 “그럼 전 선생님.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오마이 갓'에 '제기랄'이 스테레오로 나왔다. 옛날 성질만 같았어도 ‘나 학번 같은 거 안 키우요. 당신 지금 내 학력을 묻는 거요? 내 나이를 묻는 거요?’ 라면서 면박을 줬겠지만 내가 유수의 인터넷신문 기자 신분으로 만나고 있는 취재원인지라 너그럽게 봐줬다. 내 관용을 눈치도 못 채고 그 엄마는 종일 이러저런 내 취재 편의를 봐 주느라 수고가 참 많았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제일 절정을 이룬 것은 교육청 기자실에서였다.

기자실에는 십 여 명의 학부모와 한빛고 선생님들. 그리고 학생들이 나왔다. 여러 명의 지방지 기자들이 있었고 중앙지 주재기자도 있었던 것 같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지 학부모가 두툼한 자료를 나누고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새파란 기자가 자꾸 바쁘다면서 요지만 말하라고 그랬다.

자료 보고 기사는 쓰면 되니까 자료에 없는 이야기만 간단히 하라고 했다. 입시를 앞둔 아이들이 폐교가 되는데 학부모들 이야기가 어디 간단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좀 장황하게 설명을 할라치면 더 얘기 할 시간이 없다면서 급기야는 한빛고는 전남에 있는데 전북에 와서 이러면 우리가 우리 지방 기사도 넘치는데 실어 주기 쉽지 않다는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아무리 잘 써도 데스크에서 다 잘릴 거라고 했다.

같은 기자 입장에서 영 보기 민망 할 정도였다. 내가 손을 들었다. 기자실의 모든 눈이 내게 쏠렸다. 나는 실력 있는 민완기자처럼 아주 예리한 질문을 해서 이 사태의 정곡을 찔러 보려고 손을 들었는데 너무 많은 시선을 받다보니 말머리를 잃었다.

허급지급 우선 인사부터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아스팔트길을 멀리서 걸어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다고 위로를 하고는 한빛고가 정상화 되는데 내 기사가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글을 쓰겠다고 내 다짐을 밝혔다. 또한 우리 신문은 내가 기사를 쓰면 잘리거나 그러는 적이 거의 없다고 했더니 내 말에 감동을 좀 먹은 학부모가 어느 신문이냐고 물었다.

나는 진짜 기자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월급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오마이뉴스라고 혹시 들어 보셨냐고 했더니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는 역시 그 신문사에 그 기자라는 표정들이었다.

명함 좀 달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오마이뉴스로부터 명함을 받은 적이 없어서 명함도 못 내미는 기자가 되어버렸지만 어느 언론사 기자보다 환대를 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기자실에서도 나는 틈만 나면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제발 빗방울이 조금만 참아 주기를 애원했었다. 다시 집으로 와서 점심도 못 먹고 밭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구름 떼가 흘러가는 속도나 방향을 보면 최소한 1시간 정도의 일기를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에 일을 조금씩 조금씩 더 벌여 가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구름이 점점 걷히는 것이었다. 구름이 걷히니 또 걱정이었다. 비가 올 줄 알고 고추 모 옮겼지 생강 심었지 참깨 뿌렸지... 세 번째 '오마이 갓'에 '제기랄'이었다.

저녁 때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인터뷰를 하기로 한 학생 셋과 선생님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질문지도 없이 얘기를 해 나갔는데 인터뷰라기보다 대담이라고 해야 할 그런 시간이 되었다. 사진도 찍고 인적사항도 적도 전화번호도 적었다.

나는 처음부터 한빛고 이야기를 사건중심이기보다 국토 대장정에 나선 고3학생의 애환을 인간적으로 써 보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야 소위 기사가치가 있을 거라고 봤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해서 내게 맨 처음 기사를 써 보라고 했던 친구가 퇴근을 하고 나타났다. 내가 이곳 생면부지의 전라도 땅에 발을 디디고 처음 사귄 동갑내기 친구다.

다른 친구들 그리고 학부모들 이렇게 어울려 12시가 넘도록 맥주를 마셨다. 한잔 두잔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그때 나는 아주 고상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가만 있거라. 이거 취재원하고 기자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나? 기자 윤리강령인가 뭔가가 있다던데 이러다 쫒겨 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하 나는 월급도 없고 명함도 없지만 쫒겨 날 염려도 없는 만년묵이 기자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새벽 3시쯤 기사를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그렇지 나는 마감시간도 없는 기자지 싶어서 그냥 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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