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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남녘의 땅 제주도 칼바람이 부는 날이 많았습니다. 특히 바다 근처는 바람이 더 심하게 불기에 오일장이 서도 장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이 무르익는 3월에 처음으로 열린 구좌읍 세화오일장에 나갔습니다. 거의 매일 같은 풍경들이지만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각종 농기구와 어구, 그리고 보양식품이라는 굼벵이와 지네뿐만 아니라 각종 약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오일장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파종할 씨앗들입니다.
가지 가지 씨앗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것을 사다 텃밭에 심을까 생각하다 시금치 씨앗을 샀습니다. 시금치 이 천원짜리 한 봉지 사면서 이것저것 농사정보를 알아봅니다.
- "아줌마, 너무 굵게 자라는 것 말고 작게 자라는 것으로 주세요."
"아, 지금 들고 있는 그것이 야시야시한 것이라."
- "요즘 뿌리면 되는 거죠?"
"아 그럼, 이제 여기에 있는 것 아무거나 뿌려도 다 난다."
- "아줌마, 완두콩은 언제쯤 심죠?"
"그건 아직 때가 안됐다. 다음 장날에 오면 알려줌세."
그런데 오늘은 뜻하지 않게 아주 오래 전에 뇌리에서 사라졌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자그마한 증명사진, 그것도 없으면 가족들과 함께 찎은 사진을 가져다주어도 영정사진으로 그럴 듯하게 액자에 넣어져 오던 그 추억을 보게 된 것입니다.
- "아저씨, 한장 찍어도 될까요? 하두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서."
"그러슈, 영광이죠."
- "그런데 이거 손으로 그리는 거예요."
"암요, 손으로 그린다말시."
작은 증명사진 한 장을 갖다주고 한복이나 저고리 등을 고르면 그 옷을 입고 근엄하게 흑백도 아닌 칼라로 변신을 하니 참으로 신기한 재주도 다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이야 합성기술이 발달해서 포토샵이다 뭐다 동원을 하면 거의 모든 모양을 다 만들 수 있지만 어린시절의 기억으로는 작은 증명사진으로 영정을 만들어 오는 그 기술이 신기하고 놀라웠던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사진기가 귀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기에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제대로 된 사진도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작은 증명사진을 주시면서 오금리(지금의 송파구 오금동)에 사시는 아저씨에게 갖다주라 하셨습니다. 그 집을 찾아가니 작은 증명사진들이 크게 확대되어 벽 여기 저기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 신기해서 스케치 연습을 무척이나 해댔지만 실물화에는 소질이 없었던 모양인지 영 딴 모양이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잊혀졌던 향수를 세화오일장에서 만났습니다. 잊혀졌던 것을 만나게 되면 장을 보지 않아도 장바구니가 꽉 찬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시골장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어디서 본 듯한 메이커가 새겨져 있는 신발과 옷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나이키'가 '나이카'로 둔갑해 있고, '프로 스펙스'가 '프로 스포츠'로 살짝 변형된 채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골분들이야 메이커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으니 어디서 본 듯한 것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메이커가 아니어도 싸고 질기면 그만이고요.
서울의 재래시장에 가도 있을 법한 상품들이 즐비한데 참으로 앙증맞은 덧신을 보았습니다. 원색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저 작은 덧신을 신고 폴짝폴짝 뛰어다닐 귀여운 아이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꽃시장에 들러 노오란 수선화를 삽니다.
집에는 아이보리색 수선화만 잔뜩 피어있기에 노란 수선화를 함께 심으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이제 겨울에 꽃을 피울 수선화, 내년에는 아이보리색의 수선화와 노란색 수선화가 어우러져 피어 있을 마당을 생각해봅니다.
오늘 장바구니는 간단합니다.
오징어 5천원 어치, 시금치 씨앗 2천원, 수선화 4천원 그렇게 샀으니까요.
그러나 마음에는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사진에 대한 향수가 깊이 남아 있으니 에누리하지 않고도 풍성한 장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