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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라기보다 얘기 나누기 시간이었다.
강연이라기보다 얘기 나누기 시간이었다. ⓒ 전희식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그 겨울농사가 계룡산, 칠갑산 등지로 돌아다닌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겨울농사가 좀 색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겨울’의 어원은 ‘겨우’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겨울은 겨우 살아내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겨울에 시골은 일이 없다. 특별히 바쁠 일도 없을뿐더러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있으면 딱히 나돌아다닐 일이 없다. 도시인들은 겨울이건, 여름이건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계절이나 날씨 그리고 밤과 낮의 영향을 별로 안 받고 사니까 그렇다.

겨울에는 겨우겨우 지탱한다는 말은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들풀들이 매가리를 탁 놓고 짜부라져 있는 모습이라든가 하루하루 왕성하게 가지를 뻗치고 잎을 피워내던 밭의 뽕나무나 두충나무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면 실감난다.

다들 성장을 멈추고는 잔뜩 웅크린 채 겨우 살아 있다. 봄이 되면 증명이 된다. 나무들은 꼼지락 꼼지락 겨우내 나이테를 만들면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나뭇결을 만들었고 잡목들은 겉 성장을 멈추고 잎도 다 떨구어 내고서 뿌리로 뿌리로 영양분을 비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겨우 살아내는 맛

쉬는 시간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
쉬는 시간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 ⓒ 전희식
외형의 성장에 얽매이지 않고 허세를 안 부리고 겨우 살아가는 사람도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내실을 제대로 다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참 농부의 겨울농사는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농기계 기술을 배우러 다니는 일. 유기농업 강좌를 듣는 일. 정농회 회원수련회에 참석하는 일. 명상수련과 단식을 한다든가 계획을 세워 독서를 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 내 주요한 겨울농사는 농한기 겨울 동안에 인격과 영격(靈格)을 더 다듬어 완성해 가자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귀농인에 대한 정의도 색다르다.

농업에 다시 종사하게 된 사람이나 농사가 직업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농사의 참된 법도에 귀의 한 사람들이 내가 정의하는 귀농자이다. 귀농인은 노무현의 정치개혁에만 관심이 있는 게 하니라 항상 자기를 ‘파격적으로’ 개혁 해 나가는 사람이다.

이번 여행도 그렇게 마련 된 것이었고 만족스럽게 끝났다. 나는 5만원을 마련하여 출발하였다. 4일 후 돌아올 때 보니 2만5천원이 남아 있었다. 여행 중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갈 때 나를 따라서 같이 간 사람들도 있었고, 나보다 먼저 떠나 간 사람도 있었다. 혼자일 때도 있었지만 여럿일 때가 더 많았다. 술을 먹은 날도 있었고 단 한모금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모두 내가 마음먹는 대로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표까지 끊어 준 따뜻한 분들께 감사한다.

여행지가 세 곳이라지만 으뜸은 역시 계룡산 이현주 목사님을 뵙는 일이었다. 작년 가을에 이현주 목사님의 단소 연주를 들을 자리가 있었지만 너무도 짧은 만남이었다. 어느 가까운 분이 자기는 못 간다면서 나더러 독자모임에 가보라고 권했다.

월간‘풍경소리’독자모임을 말한다. 작년 초여름 첫 독자모임이 경상남도 어느 도시에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못해 아쉬웠던 차에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잘 됐다 싶어 성큼 나섰다.

노는 물이 같은 사람들

괴산에서는 유기 양계장에 갔었다. 도착 때부터 머무는 동안 가급적이면(?) 일을 했다. 먹고입고 자는 일에 빚지지 않아야 몸이나 마음이 가벼워서 그렇다.
괴산에서는 유기 양계장에 갔었다. 도착 때부터 머무는 동안 가급적이면(?) 일을 했다. 먹고입고 자는 일에 빚지지 않아야 몸이나 마음이 가벼워서 그렇다. ⓒ 전희식
저녁 6시쯤 세어보니 모인 사람들이 어른들만 모두 54분이었다. 뒤늦게 오거나 먼저 간 사람들을 다 합하면 일흔 분이 넘을 듯하다. 거친 재생용지에 사진 한 장, 색깔 한 점 안 들어가는 잡지지만 같은 독자라는 사실 하나로 서로가 느끼는 동질감은 아주 대단해 보였다. 구독료가 없는 월간지지만 항상 성금들이 제작비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런데서 오는 자부심들일까? 아무하고나 인사를 나누고 자기를 소개하고 책 이야기도 한다.

생활 속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공간들을 확보하고 이를 확장 해 나가자는 이 목사의 지론이 만든 공감대라고 볼 수도 있다. ‘풍경소리’의 낯익은 필자도 몇 분 만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는 분들도 여럿 만났다. 익산에서 농사도 짓고 음식점도 하는 녹색평론 독자모임의 정아무개 선생 부부를 1년여만에 만났고, 오랫동안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푸른꿈고등학교 음악선생부부도 달포만에 다시 만났다. 무엇보다 우리집 설계를 도와준 귀농선배이자 천연염색의 일인자 토벽선생도 여기서 만났다. 우리쌀 지키기 100일 걷기운동을 할 때 만난 서울과 대전의 소비자모임 분들도 여럿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춘천서 오신 신부님은 여전히 너털웃음과 통기타 솜씨가 일품이었다.

나를 가르치셨던 귀농학교 본부장님도 오셨다. 지금은 녹색대학 중책을 맡으신 모양이다.

‘풍경소리’독자모임에서 나는 내가 보고자 했던 바를 보았으며 내가 듣기를 바랐던 것을 들었다. 내 기대에 맞게 모임이 진행 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누구에게나 그러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큰 울림 같은 것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모임은 조용했으나 왕성했고 진지했으나 자유롭고 부드러웠다.

진행을 맡으신 김민해 목사는 밥을 먹자는 얘기와 자자는 얘기 정도를 했다. 두 시간여 이야기를 하신 이현주 목사도 아무 준비 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말은 이 목사의 입에서 나오지만 듣는 사람들이 만드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나 못 이룬 것이 없었다. 완벽한 소통이었다.

이현주 목사는 이랬다

제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찌 기운이 좋던지 뭔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습니다. 하루 내내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드는 기도시간에 그랬습니다. 주님 왜 마무일도 없었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래...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나는 유치한 질문을 하나 했었다. 두 번째는 제법 수준 있는 질문이라고 너스레를 떤 후 다음과 같이 여쭈어보았다. 언젠가 선생님이 깨달음을 줄 테니 돈 가져오라는 식의 마음공부 장사꾼들이 있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장사꾼 아닌 참된 영성 프로그램을 진행하실 생각은 없으시냐고 물었는데 질문자가 머쓱할 정도로 답변이 짧았다. 없다는 것이었다. 내 수준과 모임의 수준 차가 너무 큰 게 탈이었다.

칠갑산 산길을 걷다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나무길래 대신 들어 준다는 심정으로 사진기로 찍었다.
칠갑산 산길을 걷다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나무길래 대신 들어 준다는 심정으로 사진기로 찍었다. ⓒ 전희식
나중에 더 느슨해진 자리에서 나는 평소 궁금하던 것을 여쭈어보았다. 근대 이후로 개인 차원에서의 자유가 지금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되었고 새로운 자유의 개념이 속출하는 상태인데 여전히 완강하게 남아있는 부자유의 영역은 개인의 에고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자기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선생님의 답변은 역시 짧았다. 개인 차원에서의 자유도 아직 불충분하다고 했다. 에로로부터의 자유는 에로에 묶인 자신의 부자유를 항상 잘 들여다 볼 수 있는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모임 중에 문득문득 나를 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말과 글이 앞서가는 내 모습도 보였고 내 보이고자 하는 나와 숨기고자 하는 내가 동시에 보이기도 했다. ‘없음’과 ‘하지 않는 것’의 미덕에 대해 목사님은 귀한 언질을 주었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은 바람이 없으면 울지 않는 법인데 바람을 어디서 꾸어 와서 울게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던 것이다.

다음날 계룡산을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명이 벗겨진, 제대로 된 아나키스트들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말을 오래 간직하리라.

역사적 누명을 벗은 아나키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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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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