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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은 열 일곱 번째 맞은 내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다.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우리 성당에서는 오전 10시 30분에 미사를 지내는 날이다. 우리 가족은 오늘 또 한번 아버님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방학 때인 데다가 오전에 미사를 지내는 날이어서 우리 가족은 오늘 모두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올해 팔순이신 어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두 아이에다가 뒷동의 조카녀석도 함께 참례했다. 나는 뒷동의 동생네 가족도 모두 참례하게 되기를 바랐지만, 조카녀석만 참례할 수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제수씨는 일이 있어 미사에는 참례하지 못했지만, 어제 미리 '미사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내게 건네주어서 나는 또 한번 고마운 마음이 컸다.

우리 가족은 아버님을 위한 위령미사를 일년에 여섯 번 정도 지낸다. 두 번은 설과 추석에 지내는(조상님들과 여러 영혼들을 함께 기억하는) 합동위령미사이고, 네 번은 개별 미사인데, 기일과 생신일과 영명축일, 그리고 11월 '위령의 달'에 지내는 미사 등이다. 그 여섯 번 중에서 명절에 드리는 합동위령미사의 예물은 삼형제가 공동으로 부담하고, 네 번의 개별 미사 중 기일 미사는 뒷동 제수씨가 매년 꼭꼭 예물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아버님을 위한 위령미사에는 형제들의 우애와 화목이 오롯이 스며있는 것이기도 하니, 그것 역시 미사와 함께 아버님께는 참으로 좋은 선물이 되리라고 믿는다.

(미사예물이란 특별한 지향을 가지고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청하면서 사제에게 드리는 예물로서,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가서 미사의 제물로 사용하고 성직자와 가난한 이웃들의 생활비로 이용했던 초기 교회의 풍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 빵과 포도주가 점차 다른 예물로 대체되면서 그 예물에 미사 지향 요청이 곁들여지게 된 것은 4세기 이후부터라고 한다. 미사예물은 대개 미사 집전사제, 본당, 교구로 삼등분을 하게 되는데, 나는 일반 사회의 애경사 부조금을 기준 삼아 요즘은 3만원 정도를 예물 봉투에 넣는다. 천주교의 '위령미사'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해 11월말에 쓴 「위령의 달을 보내며」에 자세히 기술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아버님의 기일에 아버님을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그 미사에 자손들이 최대한 참례를 하고, 미사예물에 형제들의 우애가 함축되니, 아버님께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통공(通功)'의 은덕이 더욱 크게 미치시리라 믿는다.

생각하면 우리 가족의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내 아버님이 이승에서 올곧게 유지하셨던 믿음살이―신앙생활의 보람이다. 당신이 평생 동안 뜨겁게 지니셨던 그 믿음을 자식들에게 잘 물려주신 덕이다. 그러므로 내 아버님은 이승에 계시지 않는 지금 당신 믿음살이의 보람을 하늘에서 확실하고 풍성하게 거두시는 셈이다.

아버님의 신앙으로부터 연유하는 오늘의 이 풍경만으로도 내 아버님은 인생을 참으로 성공적으로 사신 분이다. 비록 부귀공명과는 참으로 거리가 멀었고, 평생 동안 가난 속에서 힘들게 사셨을망정 내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가장 고귀한 것을 물려 주셨다. 자식들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하는 마음, 일년에 여러 번씩 당신을 위해 지성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신앙심을 갖게 해주셨으니,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있을까.

내 아버님은 궁벽한 농촌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참으로 어렵게 성장한 분이었다. 그래서 학교 공부도 보통학교 3년으로 마쳐야 했다.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해야 했고, 타관 객지 유랑 생활도 해야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아버님은 청년 시절에 참으로 소중한 물음표 하나를 자신의 가슴에 심을 수 있었다. 사람은 왜 자신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 죽는 것으로 모든 게 완전히 끝인가?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왜 존재하는가? 그 의문들을 끌어안고 잠을 못 이루며 고뇌를 해야 했다.

아버님은 그 물음표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을 탐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을 찾고 신앙을 얻게 되었을 때는, 평생 동안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함도 깨닫게 되었다. 바르고 착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린이가 되어 노상 어린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아버님은 4형제 중의 셋째였다. 그 4형제분들 중에서 스스로 고뇌하고 탐구하여 하느님을 찾고 천주교 신앙을 가진 분은 내 아버님 한 분뿐이시다. 예전에 작고하신 내 백부님들과 현재 생존해 계시는 숙부님은 인생의 황혼녘에서도 내 아버님이 일찍이 가슴에 지니셨던 그 물음표와는 너무도 관계가 없다.

그래도 백부님과 백모님은 임종 직전에 내 아버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세(代洗)를 받고 운명하셨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천만 다행인 순간이었다.

내 사촌 형님들은 당신들의 부모가 숙부로부터 대세를 받고 요셉과 마리아라는 영세명을 안고 운명하셨음에도 역시 하느님을 믿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작은형님이 불교 신자인 것은 그런 대로 다행이지만, 큰형님과 중형님은 인생의 황혼을 느끼는 연세에도 종교 자체는 물론이고 철학적인 고뇌도 전혀 없으신 것 같다.

그러니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백부모님의 기일과 명절에 위령미사를 봉헌해 드리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하긴 내 모든 조상님들의 영생은 내 어깨에 걸려 있는 셈이기도 하다. 나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고 사셨던 내 모든 조상님들을 위해서도 미사를 지내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을 참으로 크게 다행스러워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아버님의 탐구심과 고뇌, 평생 동안 하느님을 믿고 사신 심성이 다시 한번 더없이 고맙게 느껴지지만, 4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천주교 신자로 사신 아버님은 많이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나라로부터 효자(孝子)와 열부(烈婦)로 현창(顯彰)된 7대조부모님 덕분에 '정문집', 또는 '효자문' 집으로 불리며 동리에서 알아줄 정도의 부농이었던 집에서 태어났음에도 조실부모한 후 공부도 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어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던 분이었다.

부모 유산이라곤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하고 평생을 등 비빌 언덕이 없는 처지에서 신산하게 살았음에도 아무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사신 분이었다.

아버님의 17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또 한번 위령미사를 봉헌한 오늘, 나는 미사를 지내면서 참으로 간절하게 아버님 생각을 많이 했다. 너무 늦게 결혼하여 아버님 생전에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여 드리지 못한 불효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에는 듯하면서도, 오르간 반주를 하는 딸아이와 미사 복사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 그리고 큰아빠와 큰엄마 사이에서 함께 미사를 지내는 조카녀석을 내 아버님께서 흐뭇한 눈으로 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우리 가족은 오늘밤에 우리의 전통 풍습대로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위령미사에는 참례하지 못했지만,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금 대전의 막내동생 가족이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주방에서는 지금 한창 아내와 가운데제수씨와 딸아이가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전통적인 제사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 제사 방식이 어느 집이나 다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제사상은 격식에 맞게 차리되, 방식은 내 나름으로 하고 있는데, 이 방식은 명절 차례를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장남인 내 가족이 예를 드린다. 내가 받쳐든 잔에 아들녀석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고, 아내로 하여금 잔을 받아 제상에 놓게 한다. 그리고 4명 가족이 합배를 한다. 다음엔 가운데동생네 가족으로 하여금 똑같은 방식으로 예를 드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막내동생 가족이 같은 방식으로 예를 드린다.

그리고 삼형제 가족이 다 함께 앉아서 주요 기도와 위령기도를 하고 성가를 부른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삼형제 가족 모두 합배를 한다.

우리 가족의 제사에는 이처럼 기도가 있고 성가도 있으니 아버님께는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믿는다. 제사 후에 온 가족이 함께 나누는 음복은 그대로 가족 모두에게 행복감을 준다. 설거지는 대전에서 온 막내 부부가 실력 발휘를 하고….

아버님의 기일이 설 이틀 전에 있어 우리 삼형제 가족은 다른 집들보다 먼저 사뿐 모이게 되는 셈이다. 17년 전 설날을 비켜 4일장으로 초상을 치를 때는 아버님의 선종 날이 다소 얄궂게도 느껴졌으나 지금은 오히려 좋게만 느껴진다. 아버님의 기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좀더 일찍 설 기분을 느끼는 것도 같고….

아버님의 기일은 아버님께나 자손들에게나 '좋은 날'임이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내 글을 즐겨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좋은 설이 되시기를 삼가 축수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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