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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고졸 학력 이하는 현역 입대도 못한다고 한다. 또, 군대 내무생활도 고질이었던 구타도 없으며, 자유 급식에다 식사 메뉴도 신세대 입맛에 맞게 개선되었다고 한다. 1950~70년대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격세지감', 아니‘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제나 이제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성년이 됨과 동시 눈앞에 닥친 병역 문제로 많은 고심을 할 것이다. 나는 고교시절 중도에서 학업을 중단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기에 대학 입학 후 가능한 쉼 없이 졸업하고 싶었다. 한 번 중단하면 졸업이 힘들지도 모르는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대안으로 학군단을 지원했다. 졸업과 동시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보병학교를 수료한 후, 곧장 전방 소총소대장으로 명령을 받아 더플백를 둘러메고 부대로 갔다.

소대장은 첫 인상과 부임 인사말이 중요하다고 선배들로부터 교육받아 잔뜩 준비했지만, 막상 막사 앞에 집합한 소대원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순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진 작업복에 너덜한 통일화, 그들 눈빛은 도시 초점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나에 대한 반가운 표정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귀찮은 상급자가 왔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준비한 인사말의 대부분을 생략해 버렸다.

부임 후 곧 개별 상담을 했다. 40명 소대원 중 고졸 이상 학력은 드물었고, 대부분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이었다. 직업도 각양각색으로 농사꾼, 이발사, 미장공, 도장공, 목수, 평택 쑥고개에서 미제 물건 장사하다 온 녀석, 중국집에서 우동 뽑다가 온 녀석… 심지어 대전-천안간 열차 소매치기하다 입대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소대원도 상당수 있었는데, 기혼자도 너댓이나 되었다. 집안 좋고 학력 높은 녀석들은 아예 면제받거나 입대해도 후방 아니면, 미군부대 카투사 육군본부로 배치 받고, 전방으로 온다해도 하다못해 중대 행정 요원으로 빠지고 말단 소총소대는 정말 돈 없고 빽 없는 녀석들만 죄다 모였다. 어쩌다가 집안 좋고 학벌 높은 녀석들이 전입 와도 곧 상급부대로 차출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소대원들과 한 내무반에서 밤낮 없이 지내다 보니 곧 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매우 순박하고 요령 피울 줄을 몰랐으며, 다양한 직업 탓으로 못하는 게 없었다. 못 한 개 없이 집도 짓고, 산중 토굴에도 구들을 놓아서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도 있었다. 참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 숯불구이도, 막걸리를 담아 술판도 벌였다. 나중에는 도시 출신의 말 많은 빤질빤질 녀석보다 학력 낮은 시골 출신이 전입해 오는 게 더 좋았다.

▲ 26 사단 73 연대 소총소대장 시절의 필자 (1970. 9)
ⓒ 박도
어느 날, 잠복초소 시범 교장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쉬고 있는데 경북 안동군 와룡면 출신의 임 상병이 내 곁으로 와서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그는 고향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입대한 소대원으로 서른이 넘었고 아이를 둘이나 뒀다.

그는 소대 내 최고령자로 별명이‘임 영감’으로 불려졌으며, 소대원 이발을 도맡았다. 대부분 이발사가 그러하듯 그도 걸쭉한 입심, 특히 Y담을 잘해서 삭막한 내무반에 활력을 주었다.

“웬 편지야?”
“꺼내 보십시오.”
인쇄물이 들었다. 펼쳐보니 부고장이었다. 돌아가신 이가 임씨가 아니었다.

“누구야?”
“장인어른입니더.”
“그래?”
“이런 경우 중대장님에게 상신하면 청원휴가가 될 깁니더.”
“나도 그건 알고 있어.”

중대 행정반으로 가기 전에 다시 펴 보았다. 우선 부고장이 인쇄된 게 의심이 갔다. 그 무렵 시골에서는 대체로 한지에 붓으로 부고장을 썼다. 다음으로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둔 것도 꺼림칙했다. 하지만 문안에는 흠이 없었다. 봉투를 유심히 살폈다.

'1969. 9. 18. 안동 와룡' 우체국 소인도 뚜렷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부고장이 가짜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다. 곧장 임 상병을 부르려다 참았다.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임 상병을 불렀다.

“임 상병, 정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나?”
“네, 그 함자가 정말 제 장인어른입니더.”
“그럼 좋아. 근데 안동은 양반고장이지.”
“네, 그라믄요. 양반고장하믄 조선 팔도에서 안동만한 곳이 없을 깁니다.”
“그런 양반고장에서는 사람이 죽기도 전에도 부고장을 보내나?”
“그런 법은 없지요.”
“그런데, 임 상병 처갓집이 그랬는데.”
“예!? 그럴 리가!”

“자, 여기를 보라고. 부고장에 장인 돌아가신 날은 9월 20일, 발인 날은 9월 22일이지.”
“맞십니더.”
“그런데, 안동 와룡우체국 소인 날짜는 9월 18일이잖아. 군대에 오면 '마누라 빼놓고는 다 죽인다'라고 하더니….”

임 상병은 그제야 고개를 팍 숙였다.
“아이가 몇 살인가?”
“큰놈은 아들인데 세 살이고, 첫 휴가 가서 만든 둘째는 가시나인데 아직 얼굴도 못 봤십니더. 마누라 편지에 이제 막 기어 다닌다고 합디다. 마누라가 추석을 앞두고 그랬나 봅니더.”
“그렇게 보고 싶으면 면회 오라고 하지 그랬어.”
“우리 안동 와룡면은 촌이라서 여자들이 군부대 면회 오는 일은 없습니더. 암만 오고잡아도 시부모에 시할매까지 있는데 우째 말하고 나설 겁니까?”

▲ 1970년 겨울 소대원들과 함께 (앞열 좌에서 두번째가 필자, 세째열 첫번째 임영규 상병)
ⓒ 박도
나는 라이터를 꺼내 편지 봉투와 부고장에 불을 붙였다.
“임 상병, 이 부고장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앞으로 열심히 근무하면 포상 휴가 내려올 때 선착으로 보내주겠다. 그만 가 봐.”
“공격! 돌아가겠습니더.”

그 날 밤, 내무반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임 상병님, 좋다가 말았습니다. 어째 그렇게 군대는 늦게 왔습니까?”
“호적도 고쳐 보고 이리저리 피해도 안 되니까 안 왔나.”
“쇼를 하려면 좀 잘하지 그랬습니까?”

“거기까지는 마누라도 생각 못했을 기라. 야, 소대장이 말이야 ‘안동 양반동네는 초상도 안 났는데도 부고장 보내느냐’라는 그 말에는 가시개질하는 사람 치고 말 못하는 사람 없다카지마는 마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

임 상병의 그 말에 내무반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임 영감님 아니 임영규 씨, 참 보고잡소. 나 옛날 소대장 박도입니다. 혹시 이 글 보시면 연락 한번 주세요. 019-9324-245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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