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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 갔다. 외가는 고향에서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교통은 꽤나 불편했다.

고향인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김천역에서 내려서 다시 경북선 열차로 갈아타서‘아천’이라는 간이역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외가 마을까지는 십리 남짓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외가로 가는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아기자기한 들길 산길이었다. 그래서 꼬박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아천역에서 외가 마을로 가는 길에는 도중 징검다리를 건너고, 둑길을 걷고, 다시 종아리를 걷어 개울을 지나면 백여 년은 더 묵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 고목 아래서 잠시 쉬면서 발바닥의 모래를 털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거기서 다시 자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외가 마을에 이르렀다. 그 무렵 행정상 마을 이름은 금릉군 어모면 다남동이지만, 흔히들‘동산리’라고 했다.

외가에 간 다음 날이 마침 외할머니 생일날이었다. 외가에는 일가 친척, 특히 어머니 동기간은 다 왔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이모들을 다 뵐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언니”라고 부르는 첫째 이모를 뵙고는 깜짝 놀랐다. 할머니 뻘 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어머니는 막내로서 외할머니가 마흔 넘어 낳았기 때문에 첫딸과 막내딸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 정도나 되었다.

안방에는 모처럼 외할머니를 중심으로 네 모녀가 오순도순 모여 얘기꽃을 피웠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란 말처럼 외모가 모두 닮은꼴이었다. 다만 나이 차로 주름살이나 흰 머리카락이 많고 적을 뿐이지, 하나같이 국화빵 틀에서 찍어낸 모습이었다.

그런데, 네 모녀 틈에 외모가 전혀 닮지 않은 한 분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분이 둘째 이모라고 내게 절을 하라고 했다. 나는 시킨 대로 절을 하면서 그분이 어머니 사촌쯤으로 생각했다.

▲ 제주 서귀포 앞 외돌괴 바위, 애잔한 부부애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박도
사랑으로 건너갔더니 깨끔한 모시 두루마기 차림에 단정히 갓을 쓴 어른이 외삼촌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외삼촌은 그분이 둘째 이모부라면서 큰절을 올리라고 했다.

외가에서는 그 이모부가 마들이 마을에 산다고‘마들이 이 서방’이라고 불렀다. 장모님 생신에 다른 사위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오지 않았는데도 마들이 이모부만 온 것이다.

나는 외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왜 마들이 이모는 외할머니를 닮지 않았어요?"
“그 이모는 엄마의 친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모부 내외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어머니의 둘째 언니가 마들이 마을로 시집 간 지 일년만에 돌아가셨다. 그 후 이모부는 다시 장가를 갔는데, 그 부인이 지금의 마들이 이모로, 이런 경우 외가에서는‘움딸’이라고 한다 했다.

나는 그 후로도 마들이 이모부 내외를 여러 차례 뵈었다. 외가의 대소사에는 거의 거르지 않았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대소 상에는 빠지지 않았고, 탈상 전날 저녁 제사 때는 이모부 내외가 손수 제물을 마련해 와서 제문까지 지어 바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당신의 친부모도 아니면서, 전처의 부모상에 그런 봉양을 한다는 일이 좀체 드문 일로 두고두고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 후 들은 바, 나의 친이모가 젊은 나이로 돌아가실 때는 일제 시대라서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공동 묘지에 모셨다는데(그때는 법으로 공동 묘지 외에는 매장을 금했다고 함), 해방 후 당신 손으로 장의 절차를 죄다 갖춰 선산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마들이 이모부의 여러 얘기를 들을수록 그분의 사람됨과 전처에 대한 열부가(烈婦歌)도 거룩하지만, 그보다 전처 부모도 당신 부모처럼 섬기는 새 이모의 고운 마음씨가 내 마음을 울렸다.

그 이모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지금도 외가마을에서는 그분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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